북한이 엊그제 끝난 남북 적십자사회담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납북자 문제를 거론하지도 말라"고 한 것은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는 망언이다. 납북자 가족들의 애끓는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북한은 불과 한달반 전쯤 평양을 방문한 일본 총리에게는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일본에 대해서는 고개 숙이기를 자청해 놓고서, 똑같은 문제로 신음하는 민족의 아픔은 철저히 외면해버린 북한은 더 이상 '민족' 운운할 자격조차 없다.

북한의 이처럼 상반된 태도는 현 정권이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는 지금껏 "납북자도 광의의 이산가족문제로 다루겠다“고 밝혀 왔는데 이 말은 사실상 '납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북한 입장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의 비인륜적·비인도적 범죄 행위를 추궁하거나 납북자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북한의 선심에만 매달리겠다는 식의 안이하기 짝이 없는 대북 저자세를 그대로 반영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일본은 납치문제를 대북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삼아 밀어붙인 끝에 지난 10년 이상 ‘납치문제는 있지도 않은 사안’이라며 전면 부인해온 북한의 사과를 받아냈고, 납치 일본인들의 영구 귀국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같은 사안이라도 이를 다루는 한국과 일본 정부의 의지에 따라 정반대 결과를 낳은 셈이다.

북한의 망언에 접한 납북자 가족들이 “그럴 줄 알았다”며 북한 못지 않게 현 정부에 대해서 강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정부가 계속해서 납북자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길 회피한다면 국민적 분노와 규탄을 면치 못할 것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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