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통일부장관이 어제 한 강연에서 “북핵(北核) 포기를 위한 압박수단은 필요없다”고 말한 것은 북핵해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거꾸로 대북 협상력 죽이기로 이어질 수 있는 백해무익한 언동이다.

‘북핵문제가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상식론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어떻게 북한과 생산적인 대화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미 북한은 ‘핵 위기’를 체제 생존용 협상카드로 사용할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도 철저히 전략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게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는 경제제재 같은 지렛대의 협상력을 아예 내던져 버리겠다고 밝히는 것은 무릇 협상이라는 것의 ‘협(協)’자도 모르는 어리석은 소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쪽의 ‘패(牌) 없음’을 미리 서둘러 상대방에게 보여준다는 말인가? 이래서는 북한 핵위기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화(禍)를 자초할 뿐이다.

미국과 일본 등 국제사회가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강조한 것은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할 기회와 시간을 준다는 뜻이지, 북한이 말을 듣지 않아도 마냥 공허한 대화에만 매달려 있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북한이 자진해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경제지원 중단 등 어떤 외교적 수단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이 오히려 대화나 협상에서 더 효과적인 전략이다.

한국정부만 북한의 ‘불량스러운 행동’에 대해 어떤 벌(罰)이나 제재도 원천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서, 그저 선의(善意)를 갖고 설득하기만 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셈이다.

한·미·일 3국의 ‘대화해결’ 합의 문구를 놓고 ‘대화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애써 강조하는 것은 DJ 정부 특유의 아전인수식(式) 계교에 불과하다.

이러다 보니 한·미 대북공조에서 불협화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경의선 공사 진척도를 놓고 한·미 군사당국 사이에 이견이 불거진 것도 따지고 보면 현 정부의 그런 ‘나대로 따로 논다’의 결과다.

현 정부의 대북·대미 정책의 난맥상은 이제 수습하기 힘든 상황에 접어든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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