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정권은 지금 세 가지 중대한 시련에 직면해 있다. 첫째는 인민들에게 세끼 끼니조차 보장해주지 못하는 주체(主體) 논리의 공허함이다.

둘째는 김일성·김정일이 기대려 했던 ‘국제 지원역량’의 소멸이다. 그리고 셋째는 남한 내 우호적인 정권의 몰락추세다.

경제파탄은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라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른바 ‘신의주 특구’라는 것은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남한도 감히 엄두조차 못 냈을 정도의 조차지(租借地) 할양(割讓)이라는 사실이다.

주체사상, 반(反)제국주의를 그토록 목에 피가 나도록 외쳐온 김정일 정권이 신의주를 아예 외국인들에게 뚝 떼어 주겠다니, 대한민국은 적어도 그렇게까지 나간 적은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경제를 살리겠다는 ‘개방’ 자체는 물론 탓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지금까지의 북한식 주체 운운만이 ‘민족적’이요, 남한식 생존방식은 ‘반민족적’ ‘사대주의적’이라던 그간의 낡은 교조는 폐기해야 앞뒤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남한 내에서도 세계화나 한·미 동맹보다 반미(反美)를 해야 마치 무슨 ‘민족적’인 양 여기는 발상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국제 지원역량’의 소멸이란 것도 더 이상 부연할 것이 없다. 10여년 전부터 ‘사회주의 형제국’이라는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오늘의 북한 핵개발에 대해서도 부시가 “평화적으로 무장해제시키겠다”고 선언해도 푸틴, 장쩌민, 고이즈미, 유럽 각국은 그 어느 하나도 일언반구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왕따’인 것이다. ‘평화적으로 해결해야’라는 당위론이야 으레 들고나오는 것이지만, 한국의 김대중 정권만 빼놓고는 전 세계가 ‘당근은 노(No)’다. ‘국제 지원역량’의 소멸인 셈이다.

남한 내 우호정권의 몰락 추세야말로 김정일 정권의 또 하나의 불운이자 손실이다. 김대중 정권은 북한 핵문제가 터진 후에도 ‘오로지 일편단심 당근만 주면 해결된다’는 사미인곡(思美人曲) 일변도다. 그러나 그런 김대중 정권은 빠르게는 두 달 뒤에, 아무리 늦어도 넉 달 남짓이면 끝난다.

근래에 반미주의 움직임이 속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럴수록 ‘그렇지 않은 다수’도 언제까지나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다수파는 북한 핵문제를 계기로 ‘6·15 이후’가 결국은 김정일 핵개발을 숨긴 채 만든 트로이의 목마(木馬)였음을 불쾌하게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바로, 남한 내 유화적인 변수의 제약요인인 것이다.

이 세 가지 시련 앞에서 김정일 정권은 “핵개발을 했으니 너 죽고 나 죽기 싫으면 먼저 우리 요구를 들어라”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하이재커 같은 수법에 대해 미국은 “흥정은 없다”며 잘랐다.

경제지원 중단, 외교 압박, 북한 고립화가 뒤따를 수 있다. 그럴 경우 일본자본 도입, 국제금융은 요원한 꿈이다. 핵공갈은 자해(自害)의 길일 뿐, 사는 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왕년에 소련이 어디 핵이 없어서 망했나?

김정일 정권이 이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오직 하나―진정으로 ‘북한주민을 위한 북한’을 만드는 것밖엔 없다.

대량살상무기보다는 속임수 아닌 정직한 남북 평화공존체제를 만들어 잘 준비된 시장경제로 과감히 넘어가는 것이다. 70년대의 6·23 선언 이래 남쪽은 일관되게 그런 원칙을 제시해 왔고, 북쪽은 일관되게 통일전선 전술에 집착해 왔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권 들어 북쪽의 통일전선식(式)이 남쪽에 왕창 먹혀들어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작금의 핵위기 앞에서도 북한의 온세상 속이기보다는, 사기당한 미국을 더 원망하는 발언까지 국회 안에서도, 당국자 중에서도 공공연히 나오니 말이다.

참으로 무엇이 나쁜 짓이고 무엇이 합당한 짓이며, 속인 자가 나쁜지 속은 자가 나쁜지조차 헷갈리게 만드는 DJ 시대인 셈이다.
그래서 이제 ‘속인 자가 나쁘다’고 믿는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이런 거꾸로 된 판을 깨끗이 끝내고, 핵무장한 통일전선 전술이 두번 다시 ‘민족적’이라는 이름아래 우리 사회에 먹혀들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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