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군복을 차려 입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나누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은 지금, 우리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이후에 불거졌던 것과 동일한 문제를 떠안게 됐다. 바로 참된 ‘실체’에서 더욱더 성가신 ‘상징’을 분리하는 것이다.

북한의 조명록 특사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친서를 갖고 미국을 방문한 사실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미국은 지난 8년 동안 아무런 권력이 없는 중간급 북한 관료들과 회담을 가져온 끝에 마침내 북한 정부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고위급 인사와 회담을 갖는 기회를 가졌다.

조명록 특사의 방문 끝무렵에 발표된 ‘미·북 공동성명’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상한 문안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원대한 취지를 담고 있다. 문안에 따르면 양측은 ‘근본적으로 상호 관계를 개선시켜 나가기 위한 단계를 밟아나갈 것이며, 어느 한 정부도 상대방에 대해 불신의 감정을 갖지 않고 양측 모두 과거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 수립을 약속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어느 누가 그런 목표에 대해 감히 논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전쟁을 금지했던 2차세계대전 전의 켈로그 브리앙 조약과 같이 단순히 평화 선언을 한다고 해서 목적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여전히 1만2000개의 포신이 서울을 노리고 있으며 화학 무기와 스커드 미사일은 물론, 비무장지대(DMZ) 100Km 근방 안에는 60만명 이상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 노동 미사일과 대포동 미사일은 말할 것도 없고 미확인 상태인 플루토늄도 있다. 군사위협 해소라는 목표에 대응할 만한 움직임이 없는 상황에서 휴전 협정을 새로운 평화 조약으로 대체하기 위한 결정은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미·북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긍정적 조치이다. 그렇지만 미·북 관계 정상화에 의해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한국인들의 우려는 잘못된 것이다.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 뒤 중·미 관계가 정상화되는 데 무려 8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된다.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곧 북한을 방문하지만, 미국의 ‘테러 지원국’ 리스트에서 북한을 제외하고 워싱턴과 평양에 양국의 연락사무소를 개설(이것은 4년 전에 합의된 사항이지만 북한이 실행을 거부했다)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다지 진전이 없을지도 모른다.

북한이 왜 이제 와서 16개월 전의 ‘페리 보고서’에 응하려고 하는지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아마 김정일 위원장은 클린턴 대통령이 3개월 뒤 퇴임하게 되면 후임자가 북한에 대해 덜 관대하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강경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미·북 관계에서 새로운 원동력은 미국의 움직임과 남북 화해 과정을 세밀하게 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북한 정부가 예전의 게임 방식대로 남한과 미국을 반목시켜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기미가 보인다면 미국은 즉각 중지해야 한다.

북한은 분명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미·북 관계와 남북 화해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근본적 문제다.

첫째, 북한은 자국의 경제 개방과 개혁이 점점 쇠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의 위험성보다 적을지 어떨지 결정해야 한다. 거의 10년간 북한은 개혁을 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해왔지만 너무 점진적이어서 많은 성과는 없었다. 둘째, 북한은 군사 위협을 경제 원조, 안보 보장과 교환하는 데 기꺼이 응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이 양측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혹은 단지 공짜로 뭔가를 얻어 내기 위해 교묘한 술책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로버트 매닝 /미 국제관계위원회 아시아지역 수석연구원

/정리=이경은기자 eu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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