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방일했던 김대중(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재계에 대해 “한국만으로는 북한의 경제개발을 감당하기 힘든 만큼 일본도 함께 해주길 바란다”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남북한 대립, 동서냉전 속에서 일본은 그동안 일관되게 한국을 지지해왔다. 예컨대 재일 코리안 사회 속에서도 일본은 한·일우호를 우선해 북한계 교포에게는 거리를 두어온 것이 실상이다. 일본이 재일 조선인을 통해 얻은 북한의 정보는 미국·한국 등의 서방측 정부에 제공돼 북한의 특이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데 일조했고, 그들을 더욱 국제적 고립에 몰아넣는 결과가 됐던 것이다.

최근의 남북한 화해물결을 놓고 “이게 바로 민족이다”라고 해설하는 한국의 식자들도 있다. 민족이란 수십년을 떨어져 있어도 알아 볼 수 있는 존재, 아무리 잔학한 행위를 했어도 세월과 함께 용서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독일을 보아도 그렇지 않고, 중국과 타이완(대만)의 예를 보아도 그렇지 않다.

독일에서는 동서분단 시절 이산가족이 오랫동안 편지를 쓰고 의사소통을 해왔다. 만남의 장소가 만들어져 자유롭게 만날 수도 있었다. 가족방문을 할 때마다 동독의 사람들은 서독의 풍요함을 체험하고 자국 정부에 대한 증오가 고조됐다. 서독 사람들은 무언가 겁에 질린 듯한 동쪽의 친척을 보고 자신과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동·서독간 왕래가 자유롭게 된 후에는 오히려 상호 왕래가 적어졌다. 그리고는 이윽고 편지 왕래마저 소원해졌다는 사례가 헤아릴 수도 없다. 즉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막연하게 그리워했던 것이다. 실제로는 ‘이웃사촌’이란 말처럼 가까운 이웃이 더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

타이완의 경우도 10여년 전부터 현역 군인을 제외한 모든 대륙 출신자가 중국에 귀향할 수 있도록 됐다. 그 당시엔 타이완도 ‘중화민국’이란 국호를 쓰면서 공식적으로는 조국통일과 대륙해방을 내세워왔다. 실제로 대륙 출신자들은 호적을 대륙에 그대로 남겨두고 타이완은 임시 거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고향에 가보니 소득은 20배나 차이가 나고, 대륙의 친척·형제는 “그 시계는 얼마짜리냐”라는 식의 질문뿐이어서 ‘눈물의 재회’라고는 말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갖고 있는 것, 입고 있는 것은 모두 친척들에게 주고 알몸으로 도망치듯 타이완에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후로 외성인(외성인)으로 불리는 대륙출신자들은 타이완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중국과의 통합을 바라지 않게 됐던 것이다.

남·북한에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산가족이 호텔에서 만난다면 그것은 가짜에 불과하다. 서로 집을 방문해 북한의 육친이 ‘위대한 지도자 동지’ 하는 것을 보아야 역사가 바뀌어질 수 있다. 물질적 풍요함 대신 억압을 선택하는 사람이란 인류 역사상 존재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남북정상회담 때 나는 북한이 과거 침략행위에 대해 한마디 사과라도 할 줄 알았다. 6·25전쟁이며,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 폭파사건 등에 대해 북한 지도자가 “잘못이었다”고 용서를 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한마디 없이 느닷없는 악수였다. 그리고는 경쟁하듯 이산가족 재회다, 관광이다, 경의선 철도다, 경제개발이다 해서 협력프로그램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일본에 대해선 50년간 사죄를 요구해온 그 한국이, 숱한 무법을 저질러왔고 한·일이 공동대치해온 북한에는 만난 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해준다는 식이라면 이번엔 일본인이 참기 힘들어진다. 태평양전쟁이 끝났을 때 나는 불과 2살이었는데도 아직 많은 한국 친구들로부터 “일본이 과거 한국인에 한 행위에 사죄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왜 북한이면 무조건 용서가 되고, 일본은 언제까지나 용서하지 못하는가. 김대통령이 북한의 경제개발 문제를 놓고 일본에 협조를 구하기 전에 그에 대한 대답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마에 겐이치

▲43년 후쿠오카(복강) 출생

▲와세다(조도전)대학 공학부

▲미 MIT 박사

▲매킨지&컴퍼니 아시아태평양지구 회장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 자문관

▲미 스탠퍼드대 비즈니스 스쿨 객원교수

▲현 UCLA대학원 정책학부 교수 겸 (주)오마에&어소시에이츠 사장

▲저서 ‘헤이세이(평성)유신’ ‘금융위기에서의 재생’ ‘1인 독주의 경제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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