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馥
/명지대 초빙교수·15대 국회의원

제임스 켈리 미국 대통령 특사의 방북을 통해 새로이 불거진 북한의 핵개발 의혹은 그 자체가 충격적인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과의 제네바 합의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계속하는 북한의 이중성에 대한 우려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켈리 특사의 이번 방북을 통해 그 이중성이 사실로 확인된 것일 뿐이다.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이에 대처하는 우리 정부의 안이한 자세이다.

1994년 10월의 미·북 제네바 합의의 대전제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동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같은 대전제가 파괴됐다는 것이 이번에 밝혀졌다. 북한이 제네바 합의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계속해 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를 미국이 들이대자 북한은 이를 부인하지 않고 시인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제네바 합의는 원래 주로 북한이 흑연감속로라는 원자로와 재처리시설을 이용해 플루토늄 폭탄을 개발하는 것을 주로 다룬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제네바 합의에서 미국은 재처리 이후의 핵폐기물의 존재를 밝히기 위한 IAEA의 특별사찰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북한은 제네바 합의 이후에는 이 합의의 허점을 이용해 플루토늄 폭탄이 아닌 우라늄 폭탄을 개발해 왔다는 것이 이번에 드러났다. 이로써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더구나 제네바 합의가 요구하는 IAEA 특별사찰은 그 1차적 목적이 “1994년 북한이 핵물질과 핵활동 내용에 관해 IAEA에 신고한 내용의 정확성을 규명하는 것”으로 돼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밝혀진 내용은 북한이 1994년에 신고한 내용이 “사실과 다른 부정확한 것”임을 북한이 “시인했다”는 것이다. IAEA의 대북 특별사찰은 더 이상 ‘필요’ 그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로써 북한의 ‘말’이 신뢰성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이다. 한 달 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방북했을 때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관한 국제조약과 합의를 준수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북·일 ‘평양선언’에 명시했었다.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제 북한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앞으로 북한을 상대하는 모든 나라들, 그리고 국제사회 앞에 던져진 큰 의문이다. “검증 없이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상대”라는 대명제가 거듭 재확인된 것이다.

이에 대해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북한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제네바 합의,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계속’ 준수하라”고 주문하는 것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이 같은 ‘조약’과 ‘합의’ 및 ‘선언’을 깡그리 위반했음이 만천하에 밝혀진 마당에 위반한 상대에게 “계속 준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더구나 이 정부는 북한이 “핵개발 사실을 시인한 것은 이 문제를 가지고 미국과 흥정할 의사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엉뚱한 ‘해몽(解夢)’을 앞세워 “대화를 통한 해결”을 역설하면서 그동안의 대북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겠다고 하고 있다. 아마도 무언가 “더 퍼주어서 핵문제에 관한 북한의 양보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인 듯하다.

정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가 위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일견 그럴듯한 논리를 가지고 국민들은 현혹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는 사이비 논리일 뿐이다. 진정한 평화는 필요하다면 전쟁을 무릅쓰고라도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을 때 지켜진다는 것을 고금의 역사가 말해 준다. 평화도 평화 나름인 것이다. 사이비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대화를 통한 해결”도 그 정도를 지켜야 한다. 북한의 이중성이 이렇게 입증된 상황에서는 정부는 북한에 대해 보다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는 마땅히 북한에 대해 핵무기 개발 포기와 함께 그 같은 포기 사실을 ‘검증’을 통해 입증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같은 요구가 수용될 때까지 지금 진행 중인 대북 경수로 사업, 금강산 관광 사업,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공사, 대북 식량·비료 지원, 개성공단 건설 등 일체의 대북 사업을 중단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해야 한다.

물론 대화는 계속해야 한다. 장관급 회담을 계속 열어서 우리 정부의 입장을 밝히고 계속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부가 말하는 ‘대화를 통한 해결’ 노력이 된다. 북한이 이에 반발한다면 그것은 북한이 ‘대화를 통한 해결’ 의향이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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