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 방문을 결정하였다.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히 검토했을 것이지만 평양에 간다는 것에는 많은 정치적인 부담이 따른다. 우선 그의 임기는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더구나 시기적으로 그의 평양 방문은 이미 차기 대통령이 결정된 다음의 일이 될 것이다.

미국에서는 통상을 제외한 대외문제에 있어 대통령이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다. 국교 정상화나 정부 승인에도 의회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수교가 안 된 북한의 방문은 물론, 국교수립도 대통령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다. 동시에 본인이 재선되지 않는 한 대통령선거 이후에 새로운 일을 벌이거나 고위직 임명권을 행사하는 것은 후임자의 행동을 속박하는 것이라고 해서 자제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방문과 관련해 사전에 고어 부통령은 물론, 부시 후보와도 협의하여 그들의 양해를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당선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취임하기도 전에 전임자가 대북정책의 대폭적인 전환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놓는 것에 대해 유쾌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이번에 대선과 동시에 열리는 상·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선전(선전)할 경우 클린턴의 ‘성급한’ 행동은 정치문제화할 가능성도 있다. 클린턴은 이러한 정치적 부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그가 김정일 위상 제고의 조역이 될 것이 뻔한데도 북한행(행)을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일차적인 목표는 북한과의 적대관계 해소다. 그로써 미국은 일본·한국뿐만 아니라 북한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되며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입지를 높일 수 있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또 다른 목표는 북한을 미국에 의존시킴으로써 테러리즘·미사일·핵무기 등 주요 문제에 있어서 북한이 협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세 번째,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를 만들어 미국이 전쟁과 무력충돌에 개입되는 위험을 없애려는 것이다.

클린턴은 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하여 미국 대통령의 방문을 선사함으로써 북한의 환심을 사고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에 빚을 지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는 레임덕 대통령이기에 오히려 국교도 없고 어제까지도 ‘악당(rogue)’국가로 치부했던 북한을 방문하는 데 부담이 적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견 미국의 이러한 목표 추구가 우리에게는 불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우려가 된다면 실제적인 긴장완화의 속도와 그에 대한 인식 및 정치적인 대응에 불균형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군사적인 대치상황은 바뀌지 않는데 평화가 왔다고 안심할 때 그에 따른 위험이 있다. 또 북·미관계가 확대됨에 따라 남·북관계에 대한 북한의 성의가 줄어들 수 있다. 동시에 남·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미국은 그 상대적인 거리를 조절하게 될 것이다.

한편, 평화체제로의 전환과정과 방법이 문제될 수 있다. 예컨대 이번에 발표된 북·미 공동성명에서는 정전협정을 ‘평화보장체계’로 바꾸는 문제에 합의를 본 것으로 되어있다. 북한이 과거에 주장하던 북·미간 ‘평화협정’을 고집하지 않았고, 또 4자회담이 언급되었으므로 우리 측에서는 군사문제에 있어서 남한을 배제하려는 종래의 북한 입장이 바뀐 것으로 이해하여 고무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한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들어간 수사에 불과할 수 있다. 북한은 결국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주장할 가능성이 크고, 만약 미국도 이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일 때 우리가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클린턴의 북한 방문은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호사다마(호사다마)라는 말이 근거 없이 생긴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한승주 /고려대 교수·전 외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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