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학을 문헌이 아닌 육성으로 들어 본다. 골격이 아닌 육체로 느끼는 북한 문학이다. 문학평론가 조영복씨가 북에서 온 시인 최진이씨와 만나 나눈 이야기를 직접 정리했다.

―북한에서 문인은 어떤 존재인가.

“기본적으로 정치인이다. 송시나 행사시 창작이 중요한 시인들의 임무이다. 아첨하는 사람들은 출세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비문학가’로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어용문인’ 혹은 ‘3류문인’쯤 되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 문인들은 문학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작가적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

―‘문학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묘사성, 생활의 발견, 진리의 발견이다. 북한 시인들은 개인 수첩에 연애시를 적어두곤 한다. 머릿속에는 사회(체제) 비판시를 암송하기도 한다. 우리 문인들은 은유, 상징같은 수사에 목말라 있다. 개인적인 정서의 표현도, 창작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문학 최후의 작은 뿌리를 지키고자 하는 작가들도 여럿 있다. ”

―문학교양은 어떻게 얻는가.

“대체로 선배작가들을 통해서다. 그들의 오래된 서가에서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 헤밍웨이 등을 구해 읽었다. 1967년 내가 인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북한에는 외국문학과 고전문학이 이미 전폐된 상태였다. 톨스토이가 누군지도 모르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구 문학작품을 비롯해 모든 지적 저작물들이 분서를 당하던 시절 얘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출판사 뒷마당에는 압수해온 서적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문인들은 그 책들을 몇 권씩 훔쳐내곤 했다. 경비한테 들켜 온갖 욕설을 듣고 끌려가기도 했다. 그 치열한 정신성이 북한 문인들에게 아직도 살아있고 후배들에게 전해진다고 본다. ”

―여기 사람들은 역시 김일성, 김정일 찬양시가 주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대체로 정치적인 보자기일 뿐이다. 개인우상화를 위한 구절이 전혀 없으면 발표 자체를 할 수 없다. 우리는 자조적으로 ‘아무데나 하나 집어넣어라 마…’ 라고 말하기도 한다. 머리 속에서만 구상되고 씌어지고 고쳐지며, 또 입으로 전해지는 창작세계가 있다. 우리끼리 밤새 만나 펼치는 구술대화를 통해서만 ‘작품’이 되는 셈이다. ”

―북한에 다녀간 문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루이제 린저는 분명 환상을 갖고 있었고, 북한에 대해 거의 몰랐다. 그가 다녀간 곳은 대부분 북한이 선전용으로 만들어 둔 곳이다. 그러나 그가 다녀간 뒤 우리는 선물을 받았다. ‘생의 한가운데’ ‘나리꽃’ 같은 좋은 작품을 읽을 수 있었다. 서방 문인이나 한국 문인이 북한에 오면 한동안 그들의 책들이 서가에 꽂히다 떠나면 곧 압수된다. 황석영 선생이 왔을 때 ‘무기의 그늘’ ‘장길산’이 도서관 서가에 꽂혔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찾아가서 읽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남한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고 신선한 문학적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서 자유를, 문학을 느꼈다. ”

―북한 문인들이 동경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유? 그것은 어쩐지 추상적으로 들린다.

“평양 대성산유희장 같은 곳에 도시락과 음료수를 들고 소풍가는 일이 유행한 적이 있다. 동료 중에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저들은 유희를 다닌단 말인가’라고 조소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 ‘생활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라고 대답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프랑스같은 나라는 내게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정치적인 자유에 대한 갈망 뿐 아니라 문학적인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기도 했다. ”

―남한에서 본 문학은 당신이 동경하던 바로 그것이었나? 남한 문학을 대한 첫 느낌은 어땠나?

“아직 잘 모르겠다. 북한에서는 정치가 문학을 질식시키는데 남한은 상업성이 그러는 것 같다. ”

―당신은 두만강을 두 번 건넜고, 네살짜리 아이를 안고 철조망 9 개를 뚫었다고 했다. 철의 여인이다. 당신에게 희망의 증거란 무엇인가?

“나는 독신으로 살고 싶었다. 북한에도 문학하는 여성은 문학에 자신의 혼을 다 불어넣기 위해 독신으로 살고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34살에 결혼을 했고 아이는 36살에 낳았다. 우리는 늘 전쟁공포에 시달렸다. 아이를 낳았는데 전쟁이 터지면 기저귀를 제대로 말릴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늘 있었다. 푸슈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시가 힘을 주곤 했다. ”

/ 정리=조영복 qbread@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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