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호
논설위원 겸 통한문제연구소장 hhkim@chosun.com

1980년대 후반 소련제국의 몰락을 예견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저서 ‘대실패’에서 “공산주의는 비록 그 명칭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대내적으로 공산주의 본질을 일탈한 곳에서나 번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의 통찰은 요즘의 북한에 그대로 적용해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북한이 지난 7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이른바 ‘경제관리 개선조치’는 한마디로 중앙정부의 계획과 통제에 의한 명령식 경제를, 가격과 시장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변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주 특구는 완전한 자본주의식 개방 구상이다. 그런데도 북한당국은 이런 조치들이 ‘우리식 사회주의’를 더욱 강화 발전시키기 위한 것일 뿐 결코 개혁 개방이나 자본주의 방식의 도입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당국의 진짜 고민이 어디에 있는지는 요즘 그들끼리 돌려보는 내부 문건에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당 간부와 군관(장교) 대상의 교육용으로 작성된 한 문건에는 이런 내용들이 담겨있다.

“최근 우리는 가격사업을 바로 하지 못하여 나라의 경제사업 전반에 엄중한 후과(잘못된 결과)를 빚어냈다. 국가에는 상품이 부족하나 농민시장에는 온갖 식료품과 공업품, (심)지어 차 부속품과 주요 원자재까지 거래되고 있다. 국가에는 돈이 없지만 개인들에게는 국가 2년분 예산액이 넘는 돈이 깔려 있다.”

브레진스키가 지적한 ‘공산주의 본질을 일탈한 곳’에서 주민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북한당국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한 처방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관리 개선조치에 담긴 진짜 의도는 이런 것이다.

“이제부터 가격제정에서 국가보상이란 일절 없다. 사회적 수요와 공급을 따질 뿐이다. 분배에서의 공짜와 평균주의도 절대 없다. 누구나 자기가 일한만큼 번 돈으로 쌀을 제값으로 사먹게 된다.”

이것은 북한에서 ‘당과 국가가 인민의 생활을 책임지는’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음을 뜻한다. 이제 인민을 먹여살리는 것은 ‘수령’이 아니라 ‘돈’이며, 집단보다는 개인이, 사상 이념보다는 실력과 노력이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는 북한주민들이 90년대의 가혹한 궁핍기를 겪으며 이미 체험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 반세기의 북한 역사는 정치 경제적으로 스탈린식 사회주의 공고화라는 직선 코스를 달려 왔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차선을 바꾸거나 아예 유(U)턴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경제관리 개선조치나 신의주 특구 구상, 미·일과의 관계개선 노력 등은 차선변경을 알리는 깜박등일 수 있다.

이런 변화는 북한이 교조적 사회주의에다 ‘상업적 사회주의’를 가미하려는 한 징표일 수도 있다. 사회 내부의 경향만이 아니라 국가의 대외정책에서도 돈에 집착하는 ‘경제동물’적 속성을 그대로 내보이기도 한다.

북한의 이런 움직임이 만약 본격적인 개혁 개방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그동안 구축해 온 견고한 사회주의 체제의 틀을 하나씩 뜯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중국과 베트남, 구(舊)소련과 동구권의 개혁이나 체제이행의 과정은 과거 사회주의 확립 단계에서 제거해 냈던 여러 조건과 제도들을 다시 회복시키는 역방향의 진행을 보여준다.

기존 체제의 해체과정은 건설과정보다 훨씬 힘들고 위험하기 마련이다. 북한의 개혁은 정치세력의 교체없는 변혁이라는 점에서 더욱 험난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신의주 특구 해프닝은 김정일의 욕심과 무모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조기경보라고 할 수 있다. 운전자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가 차선을 바꾸거나 유턴할 때라는 사실을, 복잡한 거리에서의 운전 경험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그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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