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淳子

21세기 현재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존재하고, 또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종족이 살고 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같은 민족이 갈라져 다른 나라를 세우고 살기도 하고, 여러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살기도 한다.

바람직한 일이건 아니건 현대사회의 국가란 민족집단과는 별개의 인공적인 사회 인프라의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또 정권이란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라면, 이 기본적인 틀 안에서 시대 상황적 우선순위에 따라 국민들이 선택해서 갈아입을 수 있는 옷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남한과 북한은 엄연히 독립된 두 개의 국가이다. 국시가 다르고 정치, 경제, 사회 체제가 다르고 따라서 국가의 우선순위나 국민의 생활방식, 사고방식이 다 다르다. 나라 이름도 다르고 국가의 상징인 국기도 다르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분명히 두 개의 나라이다.

더구나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과 휴전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시도 때도 없는 북측의 도발행위 때문에 북한은 우리에게 ‘주적 개념’을 한시도 늦출 수 없는 긴장관계를 유지해온 ‘외국’ 중에서도 가장 멀고 이해할 수 없는 ‘남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북한과의 회담이나 협상은 제대로 된 국제관례의 절차와 의전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식구들끼리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술 한잔 마시고 서로 어깨 두드리며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이후 대북정책은 처음부터 ‘하나의 민족’만을 내세우고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권위를 훼손하고 국기를 흔드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책 없이 서두르는 무장해제는 국가의 안전마저 위협하고 있다.

김 대통령은 지난번 최초의 평양정상회담에서 공식수교의 선수작업을 무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주권을 땅에 떨어뜨렸다. 반세기 동안 적대시하고 살아온 두 나라가 국교를 맺을 때 우선 지나온 일과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냉정하게 임해야 한다.

남북간에 그동안 쌓이고 쌓인 문제와 마음의 응어리를 국민이 납득할 수준으로나마 우선 정리했어야 한다. 적어도 납북된 국민의 현황파악, KAL기 폭파사건, 미얀마에서 일어난 고위공직자 테러사건, 최근의 서해교전 등의 대한민국을 위협한 큰 사건들에 대해서만이라도 김정일의 시인과 사죄는 물론, 앞으로의 약속 이행을 위한 계획 같은 것을 형식적으로라도 다짐받았어야 한다.

지난 달에 있었던 일·북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당당하고 담담한 태도를 본 우리는 너무도 부러운 한편 우리나라가 창피스럽다는 생각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북한에 당한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일을 가지고도 고이즈미 총리는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따질 것은 따져서 주권 국가의 위신을 세우고 자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지 않은가.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개막식부터 개최국인 대한민국은 아예 실종되었다.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 사용을 포기한 것은 현 정권이 우리나라의 독립된 주권을 포기한 사건이다.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하는 공식 국제경기에서 두 개의 다른 국가 대표선수들이 어떻게 하나로 뒤엉켜서 입장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아무렇게나 급조된 것 같이 미적 감각이나 상징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한반도기를 공동으로 들고 흔들어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우리는 태극기, 북한은 인공기를 각각 사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두 개의 국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미 통일이 다 된 것으로 들떠서 “한 민족, 한 나라”를 외치기만 하면 진짜로 한 나라가 되는 것인가?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와 지불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비용계산은 제쳐놓고 우선 잔치판을 벌여 놓고, 서로 끌어안고 춤춘다고 통일이 오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냉철하게 보지 못하는 것은 모든 비극의 시작이다. 남북의 두 정상은 동상(同床)도 아닌 데서 이몽(異夢)을 꾸고 있다. 한 쪽은 꿈속에서도 영악하고 뻔뻔하게 실리를 챙기고 있고 또 한쪽은 정신없이 끌려다니며 꿈속을 헤매고 있다.

김 대통령이 꿈을 깨고 김정일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한 통일의 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숙명여대 명예교수·도서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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