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긴 여정(여정). ’

청와대 인터넷 홈페이지(www. cwd.go.kr)에 있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 란의 제목이다. 김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13전(전)14기(기). ’ 올해까지 열네 번 추천되는 기나긴 여정 끝에 노벨상 창설 100년째, 새천년 들어 첫 수상자, 한국인 첫 노벨상 수상자라는 ‘영광(영광)’과 ‘명예(명예)’를 안게 된 것이다.

무엇이 김 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이라는 월계관을 씌워준 것일까. 이는 그의 정치적 역정(역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군사정권 하에서의 사형선고 등 여러 차례에 걸친 죽음의 고비, 6년간의 감옥생활, 55차례의 가택연금, 수년간의 망명생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맞붙어 패배를 한 것이 고난과 시련의 출발점이었다. 72년 10월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이후 유신 반대의 한 정점에 있던 김 대통령은 73년 8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공작원에 의해 납치돼 1주일 만에 서울의 자택에 ‘귀환’하면서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7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찾아온 ‘서울의 봄’도 잠시, 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내란 음모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게 된다. 그 후 사형→무기→‘20년’ 감형을 거쳐, 82년12월 석방되어 미국으로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다. 2년여에 걸친 미국 망명은 그의 미국쪽 지인(지인)들을 대폭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85년 귀국 후 87년과 92년 대선에서 잇따라 패배한 뒤, 네 번째로 도전한 97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 한국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의 막을 열었다.

노벨위원회가 올해에, 클린턴 미 대통령을 비롯한 150명의 후보들 가운데 ‘김대중’의 손을 들어준 것은 바로 이 같은 그의 민주화 노력을 우선 평가해준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의 만델라’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국제사회에서는 고난으로 점철된 ‘민주투사·인권지도자 DJ’를 높이 평가해왔다.

특히 김 대통령의 수상에는 ‘햇볕정책(Sunshine Policy)’의 추구, 또 김정일(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됐다. 조명록(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 북·미 관계정상화의 서막을 열기 시작한 것에 대해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을 가능하게 한 공로의 대부분을 김 대통령께 돌려야 한다”고 찬사를 하고 나설 정도였다.

/김민배기자 baiba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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