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에 대한 4000억원 대출 당시 산업은행 총재였던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상부(上部)의 강력한 지시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는 엄낙용 전(前) 산은총재의 증언은 이미 대다수 국민들이 짐작하고 있던 바를 확인해주는 것이다. 이 ‘상부’가 현대상선에 대한 산업은행의 어처구니없는 대출과정의 상당부분을 해명해주는 열쇠다. 이 위원장은 엄 전 총재 증언의 사실여부에 대해서 숨김없이 밝혀야 한다.

현대상선에 대한 산업은행의 대출과정을 보면 대출규정 위반은 약과이고 아예 4000억원에 대한 대출서류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다. 현대상선에 대한 계좌추적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는 정부의 옹색한 논리는 이제 설 자리가 없어졌다. 남북 ‘뒷거래’ 의혹이 아니라 금융비리 차원에서도 이번 사건을 유야무야로 덮는 것은 국민들이 용납못할 일이다.

현대상선의 당좌대월 신청서류들은 수상쩍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충식 당시 사장의 서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회사 주소와 자본금을 비롯한 주요 기재사항들이 누락돼 있다. 4000억원이 ‘사십억원’으로 오기(誤記)돼 있는가 하면, ‘1999년 6월’로 인쇄돼 있는 날짜를 지우고 ‘2000년 6월’로 수정한 부분도 있다.

더욱이 그 이전 대출 때나 이후의 서류들은 문제가 없는데 유독 4000억원 대출서류에만 이런 오류가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서명이 없어도 직인(職印)이 찍힌 이상 유효하다”거나 “담당직원의 착오”라는 구차한 변명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다. 그토록 허술하기 짝이 없는 서류로 무려 4000억원을 푼돈 다루듯 처리했다는 것은 금융관행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산은(産銀)은 규정상 일단 만기가 되면 대출금을 모두 상환받은 뒤 만기를 연장해줘야 함에도 입금절차를 생략한 채 기일을 연장해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또 남북 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되기 직전인 2000년 4월 4일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의 3개 해외지점을 통해 3000만달러를 인출했다는 사실도 새로 드러났다.

이제 산은총재에게 현대에 대한 ‘퍼주기’를 지시한 ‘상부’가 누구인가, 또 그 ‘상부의 상부’는 누구인가를 규명해 대북(對北) ‘뒷거래’ 의혹의 전모를 밝히고 그 정치적·법적 책임을 끝까지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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