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孝祥
/경제부장

“수교(修交)를 위해 소련에 20억달러를 지원했는데 남북의 평화정착을 위해 이 정도의 비용은 감수할 수 있다.” “독일도 서독이 동독에 막대한 경제 지원을 퍼붓는 바람에 결국 통일을 얻어낸 것 아닌가.”

산업은행에서 비밀리에 대출된 4000억원이 6·15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현대그룹을 통해 북한으로 송금됐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여당인 민주당뿐 아니라 일부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반응들이 나온다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만약 작금의 의혹이 사실이라면, 북으로 넘어간 이 돈은 대북(對北) 지원금이 아니라 북한 김정일(金正日)에게 바친 ‘뇌물(Bribe)’이기 때문이다.

논란이 많았던 대(對)소련 지원도 공개적인 차관(借款) 형태였다. 비록 러시아 경제가 망해 연체는 되고 있지만 법적인 근거가 있기에 오늘날까지 상환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서독의 동독 지원도 공개적인 협상과 국민들의 동의가 선행됐다. 경제 지원에는 반드시 동독이 치러야할 조건이 붙어 있었다.

1일자 ‘아시안월스리트저널’의 칼럼은 그래서 더욱 낯뜨겁다. 김대중(金大中)정부의 대북송금 스캔들에 대한 이 글은 “2년 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金正日)이 김 대통령과 웃고 있는 사진들을 기억해 보자. 그런데 그가 그처럼 웃을 만한 이유가 있었음이 차츰 드러나고 있다”고 꼬집었다.

같은 날 파이낸셜 타임스도 “김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관계개선을 대가로 ‘뇌물’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적었다. 떳떳한 지원과 뇌물은 하늘과 땅 차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번 스캔들이 DJ 정부와 현대그룹, 더 나아가 한국 전체 신뢰성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외 투자자들은 이번에 한국의 상장(上場)기업의 회계장부와 사업보고서가 ‘거짓 투성이’임을 깨닫게 됐다.

현대상선은 금융감독원에 보고하는 사업보고서에서 4000억원이란 거액의 부채를 누락시켰음이 밝혀졌다. 상장기업이 금감원에 제출하는 이 보고서는 법적인 효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보고서에 거액의 부채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한 분식회계다. 이런 회계장부를 믿고 투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현대그룹은 또 ‘경제 검찰’인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도 이 내용을 숨겼고, 공정위는 그대로 눈감아줬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국회에 제출하는 국정감사 자료에도 두 번씩이나 현대 대출 내용을 누락했다. 공적(公的) 기록을 조작(造作)한 것은 그 자체로 중대한 범죄행위다.

이런 신뢰성의 추락은 고스란히 우리 경제에 부담으로 돌아온다. 당장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 등을 돌릴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 (대북송금) 폭로가 사실이라면 (IMF 이후) 개선되기 시작한 한국의 은행과 정부, 재벌그룹 간의 유착관계가 새삼 부각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경제를 강타(强打)한 엔론 사태 등 회계부정 사건들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제 DJ정부는 더 이상 거짓말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당시 대출의 총책임자로 사태의 진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이근영(李瑾榮) 금융감독위원장이 철저한 조사에 나서지 않고, 현대상선이 ‘노 코멘트’로 버티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이기호(李起浩) 청와대 경제수석이 엄낙용(嚴洛鎔) 산업은행 총재에게 ‘걱정 말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인가? 엄 총재는 왜 국정원 간부를 만났나?

의문은 계속된다. DJ정부와 현대그룹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DJ정부는 왜 이처럼 국가적 신뢰와 국민적 자존심을 뭉개면서까지 북한의 김정일을 감싸는 것일까?

이제 DJ정부는 진상을 알고 있을 최고 책임자가 직접 나서서 이런 의문들에 대답을 해야 한다. 이는 재집권을 노리는 어느 정파(政派)가 아니라 한 문명국가의 정부로서 최소한의 의무와 품위를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로벌 경쟁 속에서 한국경제를 더 이상 망치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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