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서열 3위인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미·북관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지난 50년간 적대관계였던 양국이 진실로 우호적인 양자관계를 시작하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북한이 지금 시점에 조 부위원장을 파견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미국은 강석주 외무성 부상 같은, 보다 낮은 급의 특사를 예상했었다. 조 부위원장은 김정일의 측근이고 강력한 북한 군부의 최고위 간부다. 더욱이 그의 방문은 북한의 주요 행사 중 하나인 노동당 55주년 기념식(10일)과 일치한다. 이 사실은 김정일이 미국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려 하고 있고, 우호적인 양자관계 구축을 위한 의견을 빌 클린턴 대통령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으로부터 직접 듣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평양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은 한동안 미국과의 관계 증진을 통해 정권의 생존을 보장받으려 노력해왔다. 최근 북한의 남한에 대한 접근은 한반도 긴장을 완화시키고 경제난에 대한 지원을 확보하려는 목적 이외에, 미국을 ‘친구’로 바꾸려는 김정일의 구도에서 남한이 원군 역할을 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북한은 미국 공화당을 비우호적인 매파로 여기고 있다. 때문에 북한은 남한과 현 클린턴 행정부와의 관계를 개선해 놓음으로써, 만일 공화당이 집권할 경우 대북 강경책을 채택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만들려는 일종의 보험정책을 구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번 회담의 상징적인 의미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성과 여부도 중요하다. 양국이 서로 상대방의 주권을 존중하고, 관계 정상화를 촉진하기 위해 공동 노력하며, 북한 미사일과 대량살상 무기, 재래식 군사력 같은 핵심 안보 이슈들을 해소하기로 약속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이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조 부위원장이 주한미군의 장래에 대해 어떤 입장을 밝힐지,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된 후에도 미군이 주둔하기를 원한다는 그간의 전언들을 인정할 것인지가 흥미롭다.

조 부위원장의 방미는 또 지난 94년 미·북 양국에 의해 합의됐으나 북한에 의해 지연돼온 외교관계의 구축을 촉진할 수 있다. 미국 관리들은 평양에 미국의 연락사무소가 들어서는 것을 북한군이 안보를 이유로 반대한다고 여겨왔다. 이런 가정이 사실이라면, 군의 최고위급 간부인 조 부위원장이 그런 우려를 해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임기 막바지인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과의 양자관계가 돌연 진전되는 상황으로부터 잃을 것은 별로 없고, 오히려 얻게 될 것이다.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시킨다고 해서 당장 경제적 수혜를 줘야하는 것은 아니다. 미·북 관계 정상화의 촉진은 동북아 지역안정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북한과의 협력을 구축하려는 미국의 목적 실현을 앞당기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포용정책을 지지하게 되는 측면도 있다. 남북 우호관계의 지속을 위해 미국은 남북화해의 비판자가 아니라 지지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조 부위원장의 방미가 중요환 전환점이긴 하지만 여전히 난제가 산적해 있다. 미국 속담에 ‘문제는 구체적인 것에 있다’는 말이 있다. 북한은 가능한 한 최선의 흥정을 하기 위해 오래, 힘겹게 협상하려 할 것이다. 더욱이 논의될 주제들, 특히 북한에 의한 안보 위협 문제가 복잡하다.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앞으로 한번 더 이벤트를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내년 1월 퇴임 전 평양을 방문하고 싶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물론 대다수 과제들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차기 행정부에 넘겨질 것으로 보이지만….

조엘 위트 /브루킹스연구소 초빙연구원

/정리=주용중기자 midwa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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