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두자릭
/미국 허드슨 연구소 선임연구원·워싱턴 한·일 오찬그룹 회장

냉전 체제가 무너지자 1990년에 일본의 원로 정치인 가네마루 신은 평양으로 날아갔다. 당시 한국은 일본이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의 입장을 저해할까 우려해 그의 방북에 편치 않은 심기를 나타냈다.

10년이 넘은 지금, 상황은 바뀌었다. 한국은 일본과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 정부는 북한과 자본주의 세계와의 긍정적 상호작용이 한반도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한국 정부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방북이 북한과 일본 사이의 관계 개선을 향한 진일보이며, 또 미국이 대북 관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환영했다. 하지만 김정일·고이즈미 회담은 양국 관계를 개선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한·일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일·북 정상회담에서 나온 가장 놀라운 뉴스는 북한 공작원들이 최고 지도부의 허락 없이 일본인들을 납치했다는 것을 김정일이 시인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피랍자 가운데 8명이 ‘자연적 이유’로 사망했다고 일본측에 밝혔다. 그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두 가지 언급을 할 수 있겠다.

첫째, 그 같은 납치가 맹동분자들의 자발적 행위로 이뤄졌다는 주장은 일본뿐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중앙집권적 독재국가로 독창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최고사령관의 승인 없이 벌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둘째, 건강하고 젊던 일본인 피랍자 12명 가운데 60% 정도가 죽었다는 것은 그들이 살해됐거나 아니면 아직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그들을 계속 억류하기 위해 일부러 죽었다고 말할지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문제에 관한 북한 당국의 공식 설명을 일본 사람들이 과연 신뢰할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의 지지도는 평양 방문으로 인해 상당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을 것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살아있는 피랍자들이 송환되기 전까지는 수교 협상은 진전이 없을 것이다. 북한이 이들의 석방을 지연시키면 일·북 관계의 개선은 어렵다.

또 그들이 풀려 나더라도 그들이 겪었던 시련이 밝혀지면 일본 내에서 북한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일본 언론도 사망자 8명이 당했던 운명에 관한 속보(續報)를 이어나갈 것이다. 고이즈미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자민당 내부의 지지보다는 자신의 인기도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여론의 감정을 무시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평양에서 열린 일·북 정상회담이 관계 정상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 내에서 북한에 대한 적개심만 더욱 키우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사태가 그렇게 전개될 경우 한·일 관계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은 일본이 기대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지 못한 것이 남북 화해 과정을 위협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 같은 상황은 미·북 관계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일부 한국 사람들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적 태도가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강력한 한·일 유대는 지역 안보를 위해 필수적이다. 그런데 고이즈미의 방북 이후 관계정상화로 가지 못하고 한국이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보일 경우에는 한·일 유대관계가 타격을 받게 된다. 한국에서는 일본인 피랍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되거나 살해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들은 그것이 북한과의 관계를 얼어붙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 문제를 다르게 본다. 일본인들은 북한과 전쟁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에 북한의 그러한 행동에 대해 인내심이 훨씬 약하다. 게다가 한국인들과 달리 일본인들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연연해야 할 이유도 훨씬 적다. 현재 한·일 양국 정부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이 같은 양국민 사이의 인식 차이가 지역 안보에서의 양국간 협력을 심각하게 저해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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