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55·사진) 여사의 집은 양곤 시내에서 불과 수km 떨어진 국립 양곤대 인근 대학로에 위치하고 있다. 경찰은 아예 동네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출입을 통제했다. 기자가 다가가자 사복경찰이 튀어나와 “출입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수치 여사는 미얀마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웅산 장군의 딸. 미얀마인들이 군사독재체제에 항거해 궐기한 1988년‘랑군(양곤의 옛 지명)의 봄’때 영국에서 귀국했다가 주저앉아 이 나라 민주화의 구심점이 됐다. 그가 특히 국제적 관심을 끈 것은 1990년 이뤄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으나 군부에 의해 거부당하면서부터. 1991년 그에겐 노벨평화상이 주어졌으나 군사정권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그가 이끄는 야당 민주국민연맹(NLD)은 현재 거의 와해상태며 그와 외부와 관계도 두절되다시피했다. 지난 8월 수지는 2년 만에 지방나들이를 시도했으나 진로를 차단당한 채 9일 만에 강제귀가조치당했다.

겉으로 보이는 양곤시는 가난하지만 참으로 평화롭게 보인다. 그러나 한발짝만 안으로 발을 내디디면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여지없이 밀쳐내 버린다. 미얀마 군사정권이 물샐틈 없이 쳐놓은 감시·통제망이 작동한다.

우리 기억에도 생생한 북한의 아웅산묘소 폭탄테러사건 현장 사진을 촬영 하려니까 경비원이 황급히 나와 제지했다. 거리 풍경을 찍으려고 양곤 시청 앞마당에 들어가도 제지를 받았고, 그 옆 건물 2층에 올라갔더니 직원이 “시청건물 찍으면 큰일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자기 일상생활 외의 사소한 관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팩스, 휴대폰 보유도 허가사항이며 기업의 채용 광고는 노동부 허가를 얻어야 한다. 예금통장을 개설하는 데도 1주일이 걸리며 외국에 나가려면 한보따리의 서류뭉치가 필요하다. 모든 것이 ‘허가’ 내지 ‘금지’의 천국이다.

미얀마인들에게는 일상이 숨막힐듯한 긴장의 연속이다. 팩스로 민감한 정치적 이슈를 외부에 전달하는 것만으로 국정교란방지법이 적용돼 중형에 처해진다. 가두시위나 야당집회는 참석 자체만으로도 징역에 처해진다. 사석에서 정부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을 살고 나온 상류층 인사도 있다.

언론은 99% 통제가 된다. 미얀마 유일의 TV 방송인 MR-TV의 저녁 7시 뉴스는 거의 고관들의 동정을, 그것도 계급순으로 나열해 방송하는 것이 고작이다. 한 일본인 사업가는 “현지언론에서 사건사고소식조차 제대로 보도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외국인들이 체류하는 호텔, 기업, 숙소들은 정보기관의 집중감시대상이다. 거리 곳곳에 수많은 비밀경찰이 배회하고 있다고 미얀마인들은 말한다. 미얀마의 군인들은 무소불위(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다. 1962년부터 지금까지 사실상 군정(군정)을 해온 탓이다. 미얀마의 대학들은 1996년 말부터 4년째 휴교했다가 지난 7월 24일 수업이 재개됐다. 이통에 96년도 고교졸업생부터 99년 졸업생들까지 동시에 입학·졸업을 해야 할 판이다. 양곤대를 찾아갔다가 “외국인은 출입금지”라는 이유로 쫓겨나고 말았다. 학생들에게 유해한 사상을 전파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것. 이처럼 필사적으로 군부정권이 통제를 해도 일반국민들은 알 것을 다 알고 있다. 평범한 미얀마인들도 일단 신뢰감을 보이면 봇물 터지듯 현실비판을 한다.

문제는 미얀마에서 군부를 대체할 세력이 없으며 단기적으로 어떤 변화의 조짐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렵사리 접촉한 한 군 관련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언젠가 민주사회로 이행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웅산 수지는 안된다. 그가 독립을 원하는 130여개 종족들을 다스릴 능력이나 경험이 있을까. 이웃 인도네시아가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라. 더구나 그녀는 우리 식민통치 지배자인 영국사람과 결혼하고 자신도, 자식도 국적이 영국인이다. 한국인 같으면 일본남자와 결혼한 일본국적의 한국여자를 지도자로 맞이하고 싶겠는가”

/양곤(미얀마) =함영준특파원yjhah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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