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최근 미군철수를 다시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난 27일에 이어, 29일에도 미군철수를 주장했다. 특히 27일에는 노동신문의 논평이라는 형식을 빌렸다. 북한이 미군철수를 주장한 것은 정상회담 이후 사실상 처음이다. 정상회담 직후 북한방송에서 잠시 언급된 바 있지만 정식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노동신문이 직접 나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미군철수 문제가 부각된 것은 지난 6월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 필요성에 대해 합의했다는 보도 때문이었다. 김 대통령은 지난 9월 8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상회담의 최대 성과가 바로 김 위원장이 미군주둔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노동신문의 논평은 그동안 북한의 입장이 바뀌었음을 뜻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북한 내부용일 수 있다. 북한은 지난 50년 동안 주한미군이 한반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의 열쇠라고 설명해 왔었다. 미군이 남한에서 물러가면 바로 통일이 이루어지고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주민들을 달래 왔다. 그래서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미군철수 주장을 거둬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북한체제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노동신문은 북한 노동당의 대변지이다. 다른 매체도 비슷하지만 특히 노동당의 논평은 바로 노동당의 공식 입장이자 김정일의 생각이다. 북한 사람들은 노동신문을 통해 김정일의 뜻을 알게 된다. 노동신문이 김정일의 뜻에 어긋나는 보도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북한 주민을 위해 수령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북한이 미군철수 주장을 다시 제기한 것은 고도의 전략적 계산이 깔려있는 의도된 행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노리는 전략적 목적은 무엇일까.

역시 미국에 대한 카드라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의 화해·협력 분위기가 미군철수 주장으로 이어지면서 미국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김영남의 뉴욕 방문이 무산된 후 더욱 그랬다. 현재 뉴욕에서 카트만과 김계관 차원에서 포괄적 협상이 진행 중이며, 셔먼 대북조정관의 북한 방문도 계획되고 있다. 특히 북한의 조명록 총정치국장이 11월 9일부터 나흘간 미국을 방문한다는 사실은 미북 관계개선 협상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명록은 북한 군부의 실력자이다. 김정일의 권력은 군부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른바 ‘선군(선군)정치’라는 것이다. 군에 대한 고려가 모든 것에 우선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국가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조명록은 이 선군정치의 핵심이다. 김정일과 군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사실상 제2인자이다. 이런 위치에 있는 실력자가 미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미국과 북한간에 주한미군 문제는 물론, 미사일을 포함한 모든 군사문제에 대한 포괄적 협상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북한은 오래 전부터 주한미군을 포함한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 문제가 미국과 협의되어야 할 성질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군사문제와 평화체제 구축 문제는 기피했었다. 국방장관 회담을 하면서도 경의선 복원에 군 병력을 동원하는 문제만 협의하려 했었다. 남북간에는 이산가족이나 경제문제만 다루고 군사문제는 미국과 논의할 사항이라는 전략적 계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한미군 문제도 신축적 자세의 운만 띄운 채 실질협상은 미국과 하겠다는 의도였음이 이제야 보다 확실해지는 것 같다.

정종욱 /아주대 교수·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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