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프랑스인 신부의 한국 사랑이 그의 내한 100년, 선종(선종) 50년을 기념해 재조명된다. 경기도 안성 성당(주임신부 이상돈·이상돈)은 이 성당 설립자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를 기리는 성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10월 3일 다채롭게 펼친다.

1900년 10월 19일 사제 서품을 받은 지 4개월 되는 25세의 신부 안토니오 공베르가 이역 만리 조선 땅의 안성(안성)에 도착했다.

9남매 중 4명이 신부가 되고 3명이 동정녀였던 독실한 가톨릭 집안 출신인 그는 당시 조선 선교를 담당하던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이었다. 공베르 신부는 1933년 이곳을 떠날 때까지 열성적으로 천주교를 전했다. 그가 처음 왔을 때 전무했던 안성 지역의 천주교 신자는 1921년 1616명에 이르렀고 이듬해 한옥 2층의 성당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공베르(한국명 공안국·공안국) 신부는 훌륭한 선교사인 동시에 일제의 식민 통치에 시달리던 조선인의 좋은 친구였다. 그는 1909년 ‘안법학교’(현 안법고등학교)를 세워 신식 교육을 실시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사제관에 시위대를 숨겨주기도 했다. 또 프랑스에서 포도나무를 들여 와 인근 농민들에게 재배하도록 했다. 오늘날 유명한 ‘안성 포도’는 공베르 신부에 의해 처음 시작된 것이다. 공베르 신부는 1935년부터는 신부 지망생을 가르치는 소(소)신학교 책임자로 일했다. 김수환(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원로 사제들의 상당수는 소년 시절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1950년 6월 27일 대포와 총 소리 속에서 사제 서품 50주년 행사를 마친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는 서울에 들어온 공산군에 체포됐고 동생 줄리엥 공베르 신부 등 동료 신부들과 함께 평양으로 이송됐다.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여름 옷 차림으로 압록강까지 끌려간 공베르 신부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11월 12일 중강진 하창리 수용소에서 선종(선종)했다.

물 설고 낯 설은 타향 땅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50년의 세월을 보내고 목숨까지 바친 벽안(벽안) 신부의 정성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 만에 재조명되고 있다. 안성 성당은 공베르 신부의 흉상을 세우고 그의 활동을 널리 알리는 한편 북한 천주교의 도움을 받아 공베르 신부의 묘역 단장을 추진하고 있다.

10월 3일 오후 3시 열리는 안성 성당 100주년 기념식에는 프랑스에서 공베르 신부의 조카들과 그의 고향인 프랑스 바라크빌 성당 주임신부가 참석한다. 또 공베르 신부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안토니오의 포도’가 안성시의 지원으로 만들어져 10월 2일 오전 11시5분 MBC TV를 통해 방영된다.

/안성=이선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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