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국사학도로 만들었는가를 자문한다면 유년기의 강제적인 서당 교육이 뿌리가 되고, 대학 시절의 강렬한 자아 의식이 줄기를 잡아주고, 교수가 된 이후의 규장각 경험이 잎과 가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지(지)를 바꾼 순간은 역시 대학 시절, 그 중에서도 4·19를 전후한 시기다.

1957년 대학 입학 당시만 해도 우리 것을 ‘엽전’이라 천시하고 서양을 극도로 숭상하던 시절이었다. 나도 그 대열에 끼어 영문 ‘타임’지를 호주머니에 끼고 교정을 어슬렁거리는 것을 멋으로 생각했다.

원래 지적 호기심이 많은 편이어서 명 강의로 알려진 것은 학과를 가리지 않고 ‘잡식성’ 공부를 했다. 그러나 주된 관심은 서양과 중국 쪽이었고, 국사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당시 국사 연구가 학문적 체계가 잡히지 않았고, 강렬한 문제 의식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양사와 중국사를 주로 공부하고 사회에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 나에게 국사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 것은 4·19 전후의 ‘민족주의 바람’이었다. 최문환(최문환) 교수의 ‘민족주의 전개과정’, 박종홍(박종홍) 교수의 ‘한국철학사’, 상대 박희범(박희범) 교수의 ‘후진국 개발론’ 등이 자아 의식을 일깨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어 4·19 혁명의 체험과 그 이후 봇물처럼 들어온 제3세계의 이념 서적을 접하면서 가슴이 터질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시기가 정치적으로는 카오스였지만, 사상적으로는 4·19 세대를 새로운 이념집단으로 만들었다. 네루·수카르노·나세르·카스트로·모택동 등의 민족주의 노선이 젊은이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오고, 북한·중국·일본·소련에 대한 학술 정보도 홍수처럼 들어왔다. 제도권 안에서나 대학 강단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엄청난 지식 정보의 바다에 빠졌다.

이렇게 감상적으로 시작된 자아 의식은 신채호·박은식·안재홍·손진태 등 선배 역사학자와 정약용·정도전 등 역사적 인물의 저서를 접하면서 구체적인 연구 방향을 잡아갔다. 나와 주변의 국학도들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면서 한국판 ‘질풍노도’ 운동에 빠져들었다.

좀 거창한 말이지만, 내 딴에는 소명을 받은 듯한 사명감으로 학문 생활에 진입했다. 사람들이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역사의 광맥을 캐내어 서양의 역사처럼 감동을 주는 역사로 가공해 내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정신없이 40년 동안 달려온 것이 오늘의 내 모습이다.

나의 학문생활은 흥분과 감격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종교 대신 꿈을 먹고 산 것 같다. 20세기 물신주의(물신주의) 문명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이 전통 문화에 있다는 믿음 때문에, 60세가 넘어서도 역사의 무지개를 좇으며 학문의 즐거움을 내 나름으로 만끽하고 있다.

/한영우 서울대교수·한국사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