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찰스 카트먼 한반도 특사, 26일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된 웬디 셔먼 대북자문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등 한반도 문제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고위 인사들이 잇따라 서울을 다녀갔다. 이들은 남·북문제나 한·미관계에 대한 논평을 극도로 자제했다.

미국은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일련의 남·북한 문제에 대해 의례상 환영한다는 형식은 갖추었지만, 전략적 판단에 의한 지지와는 거리가 있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나 외교 관계자들도 “사태를 관망하겠다”며 침묵하고 있다. 미국이 남·북한 문제에 대한 말을 아끼고 있는 데 반해, 한국 정부 인사의 검증되지 않은 인기성 발언은 나라 안팎에서 불거져 나오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 안보의 틀이 한·미 공조를 통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올 들어 매향리와 노근리 사건, SOFA 개정 등 일련의 사건들로 한·미 간에 마찰이 빚어진 상태에서 전격적인 평화협정 체결 발표와 경의선 복원 착공 등이 현실화하면서 한·미관계의 기본 구도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우리 정부의 한 인사가 말한 ‘2003년 평화협정 체결’ 구상은 미국으로서는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남·북한 평화협정이 체결되려면 정전협정이 폐기돼야 하는데, 미국이 정전협정에 조인한 실질적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은 심정적으로는 남·북한 간의 문제지만, 법률적으론 미·북 간의 문제다.

남·북한 평화협정이라는 숙제를 풀려면 먼저 미·북 수교와 미·북 평화협정을 통해 미·북관계 정상화가 이뤄져야 한다. 북한의 ‘테러 지원국’ 해제 문제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아 미·북 수교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정부가 평화협정 체결시기까지 2003년으로 못 박고 있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평화협정 논의는 군사적으로 한·미 간에 미묘한 구도를 형성한다. 현재 우리 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1950년 UN총회 결의에 따라 주둔하는 유엔군사령부와, 1953년에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파견된 미군 태평양 사령부에 소속된 3만7000명이 있다.

유엔군사령부는 전쟁이 재발할 경우 추가의 UN결의 없이도 UN군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유사시에는 태평양사령부를 통하지 않고 바로 백악관으로 연결되는 통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북한도 주한미군과는 별도로 유엔사의 해체를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다.

유엔사는 ‘북한의 침략 방위와 한반도 통일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에 유용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유엔사 해체’를 말하는 것은, 한국의 본심이 무엇인지, 무슨 대책이 있는지 헷갈리게 한다.

남·북한 신뢰구축을 위해 평화협정을 시도한다면 먼저 실질적인 군비 축소, 부대의 후방 배치, 대량 살상무기 개발·판매 금지와 같은 군사적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 사찰·감시 등을 몇 년간 이행하면서 상호 간의 신뢰를 쌓아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군사문제에 대한 진전 없이는 ‘남·북한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해도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1991년 상호불가침을 명시한 남·북기본합의서도 체결 당시 엄청난 기대를 모았으나,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를 만난 한 미국관리는 “한국 정부가 시한에 쫓기는 것처럼 남·북한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다”며 “사전 논의와 진중한 협의가 아닌 일방적 통보는 동맹국 간의 의견 조율 방법이 아니다”라고 한·미공조의 공백을 우려했다.

최근 정부 관료나 외교 관리들의 사적인 견해가 지나치게 노출되는 현상은 남·북한과 미국의 외교관계에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정부는 통일에 대한 성급한 기대보다는 국내 여건과 국제 관계를 고려하여, 장기적인 차원에서 대북문제를 전개해야 한다. 외교관계에 있어서 침묵은 긍정이 아니다.

김 정 원 /세종대 교수·국제정치학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