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태극기와 북한 인공기(人共旗)의 사용범위와 위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남북관계의 변화 속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확립해 나갈 것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그만큼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하는 사안이다.

태극기는 ‘한민족’보다는 ‘대한민국’의 이념과 가치를 담고 있는 최고 상징물이며, 그 어떤 편의적 목적을 위해 간단히 내팽개칠 수 있는 종속물이 아니다.

또한 아시안게임은 민족단위가 아닌 국가단위로 참가하는 행사이며, 더구나 대한민국은 이번 대회의 주최국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회 개·폐막식 때 남북한 선수단이 태극기나 인공기가 아니라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동시 입장하는 데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정부가 엊그제 남북 실무접촉을 통해 개·폐막식 때 태극기를 포기하고 한반도기를 사용키로 북한에 서둘러 합의해준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현 정부가 국가 정체성과 체통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전문가들의 깊은 검토와 충분한 국민적 여론수렴 과정을 차단한 채, 쫓기듯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는 데만 급급했다는 질책을 모면할 수 없다.

남북 합의내용대로라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은 대회 참가비용을 대부분 남측으로부터 지원받으면서도 마치 공동개최국 같은 위상을 확보하게 됐다. 결국 북측으로서는 대한민국 안에서 대한민국 돈으로 자기네 체제선전과 통일전선 이벤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정부는 최소한도 북한에서 국제대회가 열릴 경우도 북측이 인공기를 포기하고 한반도기를 앞세우며, 또 응원석에서 태극기 사용을 하게 한다는 보장이라도 받아냈어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인공기가 휘날리게 된 반면, 북한에서는 지원물자를 실은 우리 선박마저 태극기를 내려야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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