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翰雨

정사(正史)보다 야사(野史)가 재미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야사가 훨씬 폭넓게 읽힌다. 그렇다고 야사만 읽으면 이야깃거리만 남고 정작 ‘역사’는 놓치는 우(愚)를 범하기 쉽다. 1980년대 이후 유행한 ‘새로 쓴’, ‘다시 쓴’, ‘뒤집어 본’ 한국 근·현대사는 ‘현대판 야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이 정말 뒤집어진 탓인지 야사가 정사가 되고 정사는 증발해 버리는 일이 우리 교육현장에서 벌어질 것 같다.

내년부터 사용될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일부에 김일성(金日成)의 보천보전투가 크게 실려 논란이다. 이번 논란을 파악하는 핵심은 사관(史觀)의 문제와 교육적 배려의 문제 두 가지다.

문제가 된 교과서들이 채택한 사관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을 때려죽여야 할 사람처럼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보천보전투라는, 독립운동사에서 거의 유일한 국내 진공(進攻)작전을 폈던 독립운동가다.”

물론 그 교과서들이 이렇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천보전투의 경우에도 ‘김일성’ 이름 석자는 빼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보천보전투만 배워도 언젠가는 그것이 김일성과 관련된 사건임을 금방 알게 되고, 나아가 그런 유의 ‘사관’에 은연 중 물들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미 우리 현대사에 관한 각종 야사로 무장한 집단들의 삐딱한 역사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들, 특히 좌파나 ‘민족해방론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면 없는 사실을 교과서에 실었다는 말인가?”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서 모두 역사서에, 특히 역사교과서에 실리는 것은 아니다. 이미 어떤 사건을 ‘의미있게’ 다룰 것인지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역사서술자의 사관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김일성이 잠시나마 독립운동을 하기는 했지만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켜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고 게다가 자기 치하의 북한마저 전 세계에서 동냥이나 하는 거지나라로 만들었다”는 사관의 소유자도 과연 보천보전투를 그렇게까지 교과서에 ‘의미있게’ 삽입하려 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교육적 배려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어떤 사건이나 인물이 교과서에 실리기 위해서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연구, 학계의 폭넓은 동의와 판정, 그리고 고등학생 수준에 적합한지의 타당성 검토를 거쳐야 한다. 보천보전투의 경우 첫째와 둘째 요건은 거의 생략돼 있다. 이것만으로도 아직은 그 사건을 교과서에 싣기는 이르다.

세 번째 요건과 관련된 문제도 심각하다. 그런 교과서를 읽고서 우리 학생들이 과연 대한민국에 자부심을 갖겠는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자부심을 갖겠는가?

사실을 비트는 것뿐만 아니라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을 쓰거나 강조해야 할 것을 빼버리는 것도 역사왜곡이 될 수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북쪽 김일성의 예를 들어보자. 광복 직후 남북한을 통틀어 민족지도자의 서열에 김일성은 제대로 끼지도 못했다. 반면 이승만은 당시 공산계열이 주도한 인민공화국 명단에서도 주석으로 추대될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그것이 그때 국민들의 정확한 판단이며 바로 그때 일어났던 일, 즉 ‘역사’다. 그러나 이번 교과서에는 이런 중대한 사실이 빠져있음은 물론, 어떻게 해서 광복 직후 이승만이 김일성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를 알게 하는 이승만 관련 사실(史實)은 고스란히 빠져 있다.

이런 교과서를 읽고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 한다면 그 학생이 이상한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교과서로 맹목적인 애국주의를 심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다만 정확한 사실 발굴과 역사에 대한 균형감각조차 느낄 수 없는 교과서가 차세대 주역들에게 ‘주입’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교과서 집필자들은 자신들이 교과서를 쓴 것인지, 본의 아니게 역사를 입맛대로 덧칠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논설위원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