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최근 한·미·일을 상대로 펼치고 있는 대화 전략에는 그 나름의 치밀한 계산이 내재돼 있다. 그것은 한반도 평화와 안보에 직결된 본질적 사안은 미·북대화에서 다루고, 남북관계와 일·북관계에서는 일련의 화해제스처를 통해 북한정권이 필요로 하는 경제적 이득을 최대한 얻겠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평통은 지난 1일 미국과의 대화에서 서해상의 북방한계선(NLL)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6·29 서해사태의 최대 피해자인 한국은 정작 이 문제를 다루는 대화에서 배제돼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남북은 금강산에서 열린 장관급 회담 실무접촉에서 오는 12~14일 서울에서 장관급 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남북 장관급 회담, 민간차원의 ‘8·15 서울 민족통일대회’, 9월 북한의 부산 아시안게임 참가 및 남북 축구대회, 이산가족 상봉 등이 줄을 잇게 될 경우 한반도는 외형상 해빙무드에 젖을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엔 간과해선 안 될 허점 또한 매복돼 있다.

이산가족 문제만 해도 정작 이들의 만남을 제도화·정례화할 수 있는 합의는 요원한 미래의 과제에 머물고 있는 반면, 북의 선심(善心)에 따라 이산가족들이 부정기적으로 상봉할 기회를 갖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다 북한이 쌀 30만t 지원 같은 실리를 충분히 챙기게 되면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 국면으로 곤두박질치곤 했던 게 지난 세월의 경험이다.

따라서 임기 말에 굳이 대형 남북행사를 만들고 있는 김대중 정부는 이번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점을 증명할 책임이 있다. 그 출발은 서해사태 사과 및 재발방지, 책임자 처벌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진의를 확인하고 국민의 동의를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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