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독신으로 살며 무소유(무소유)를 실천한 전 이화여대 장원(장원·여·85·기독교학과) 교수의 삶이 타계 후 더 크고 환하게 드러나고 있다.

23일 오후 이대 기숙사 국제관 3층의 7평 남짓한 방. 지난 10일 세상을 떠난 장 교수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이곳에 제자 5명이 모였다. 장 교수가 남긴 ‘나누며 사는 정신’을 잇는 방법을 논의하고, 고인의 체취도 느낄 겸 해서다.

제자들이 수시로 찾았던 듯, 방문에는‘선생님 ○○○ 다녀갑니다’란 메모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검소하기로 소문난 장 교수답게 별다른 유품은 없었다. 계절별로 1~2벌의 옷, 낡은 속옷을 곱게 접어 만든 걸레, 제자들과 주고 받은 편지와 우표엔 아직 장 교수의 체온이 남아있었다.

이대 동대문병원 김경희(소아과) 교수는 “선생님은 월급 한 푼 가지려 하지 않으셨다”며 “선생님 도움으로 학교를 마친 제자가 많다”고 했다.

장 교수의 숨은 선행은 지난 10~12일 이대 동대문병원 영안실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 둘 얘기하면서 제대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 자리엔 신낙균 의원, 장상 이대 총장, 전현직 교수 등 많은 제자와 이름 모를 50대 남자, 20대 젊은 학생 등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까지 찾아와 오래도록 빈소를 지켰다.

성신여대 김하자 교수(윤리교육)는 “서럽게 우는 낯선 남자가 있어 물어봤더니, 6·25 직후 포항의 한 고아원에서 도움받은 사람이라고만 했다”며 “선생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도왔는지 다 알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오 목수’로 불리는 이대의 목수는 “60~70년대에 선생님은 별 일거리가 없는데도 굳이 나를 불러 일하게 하셨다”며 “힘들 때 생계에 꽤 보탬이 됐다”며 장 교수 은덕을 기렸다. 오래 전 장 교수 도움으로 의안(의안)을 할 수 있었다는 진부령의 한 산장 주인도 먼길 마다않고 찾아와 영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흘간 빈소를 찾은 사람은 모두 200여 명. 김하자 교수 남편인 하동철 서울대 미대 학장이 맏상주를 맡았고, 제자들 남편 10여 명이 돌아가며 상주 자리에 섰다.

3일장 뒤 빈소에 모인 이들은 자연스레 “자주 모여 선생님의 뜻을 따르자”고 합의했다. 장 교수가 늘 “내 영혼에 무지개가 떴으면 좋겠다”고 입에 올리던 걸 기억해, 모임 이름은 ‘장원 무지개 가족’이라 붙였다.

장 교수가 이 땅에 남긴 것은 통장에 넣어둔 400여 만원뿐. 이도 제자들에게 부탁한 장례 비용이었다. “절대 그 이상 쓰지 말고, 부조금도 받지 말라”는 게 유언이었다.

항상 장 교수 뜻을 따랐던 제자들은 그러나 이번만은 거스르기로 했다. 장 교수가 남긴 400만원과 부조금에 조금씩 돈을 보태 4000만원을 만들었다. 무지개 가족은 요즘 이 돈을 어디에 쓸지 고심중이다. 장학기금을 만들지, 장 교수 고향인 북한 땅에 나무심기 운동하는데 보탤지, 아니면 기금을 더 확충할지….

제자들은 곧 다시 모여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이 돈으로 무얼 하셨을까’하고 얘기를 나눠 볼 계획이다.

/신동흔기자 dh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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