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햇볕정책의 전도사’로 불리는 학계나 언론계의 전문가란 사람들이 이번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내놓고 있는 진단의 일부다. 일반인들은 쉽게 이해하는 북한의 도발을,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그들은 왜 설명할 수 없는 걸까.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북한의 지도부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탈냉전적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러니 이번에 서해상에서 보여준 북한의 ‘냉전적 도발’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부 언론들도 동조하고 있다.

그들의 사고에는 결정적인 요소 하나가 빠져 있다. ‘현실’이 그것이다. 그들은 관념으로만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틀을 바꿔야 하는 명확한 반박논거가 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도, 일정한 관념의 윤색을 통해 그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태로 뒤집는 희한한 재주를 갖고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다른 것은 다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북한 지도부의 의도와는 무관한, 군부 강경세력의 자충수일 것”으로 즉각 단정해 버리는 기법 또한 그런 재주의 하나다.

너무나 진부하지만 그래서 더욱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한반도는 민족은 하나일지 몰라도 국가는 여전히 둘이다. 하나는 6월 한 달 우리가 그렇게 목 터져라 외쳤던 ‘대한민국’이고, 또 하나는 이번에 도발을 감행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민족은 관념이고 국가는 현실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일관되게 현실을 외면한 채 민족이라는 관념에만 매달리는 것일까. 그들의 ‘외눈박이’ 편향성은 80년대 말 대학가의 ‘북한 바로보기’ 운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랫동안 북한문제를 체제유지책의 일환으로 활용해 온 폐단이 컸기 때문이겠지만, 당시 ‘북한 바로보기’는 돌이켜 보면 ‘안티 반공(反共)’일 뿐이었다. ‘바로보기’라기보다는 권위주의 정부들이 그려놓은 북한상(像)과는 ‘무조건 반대로 보기’였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반공적 북한관’이라는 관념에서 ‘제대로의 북한관’으로 가지 못하고 ‘친공적 북한관’이라는 또 하나의 관념으로 가버렸다. 여기에는 주사파의 득세도 한몫 했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친공성(親共性)’은 많이 퇴색됐지만 점차 그 자리를 파고든 것이 관념으로서의 ‘민족’이다. 그들이 자신들만의 북한관에 동의하지 않으면 즉각 ‘반민족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행태는 이런 뿌리를 갖고 있다.

물론 우리처럼 단일민족이 분단된 경우 민족의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언젠가 남북이 통일되면 국민통합의 주요한 에너지도 결국은 ‘민족’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민족을 두 국가로 만든 원인들은 지금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민족’은 아직 현실보다는 관념쪽이다. 현실에 바탕을 둔 대북인식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에 “지원은 하되 군사적 전용(轉用)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정도의 주장조차 ‘극우’ ‘냉전’ ‘수구’라며 발끈하는 일부 논자들이 북한 정규군에 의한 무력도발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침묵하며 우리의 일방적인 인내만을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북조선에 관대한 그들’이 관념의 늪에서 헤매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들 중 그나마 현실감이 좀 있다는 사람이 내놓는 처방이 “응징을 하면 확전(擴戰)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참는 게 낫다” 정도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슨 평화주의자라서 이런 주장을 하는가? 만일 주변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무작정 따귀를 세게 때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들은 확전을 우려해 참을 테니 말이다.

만일 그러지 않고 “왜 때리느냐”며 따지고 든다면 기꺼이 한 대쯤 맞아줘도 괜찮다.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현실에 눈뜬 사람이 한 명 더 늘게 되었는데 따귀 한 대 맞는 거야 못 참겠는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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