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성공 축제가 벌어졌던 어제, 시청 앞에서 광화문으로 가는데 행인이 하는 말이 들렸다. “어, 충무공상 앞에 조기(弔旗)가 걸렸네.” 동상 바로 앞에 갸름한 장방형의 검은 깃발모양의 것이 드리워져 있어 누가 보아도 조기를 연상하게 돼있었다. 서해 무장충돌 사건의 미온적인 대처를 두고 해전의 영웅인 충무공 정신의 증발을 통탄하는 민심의 반응이거나, 우리 해군 함정이 격침당하고 그에 대한 응분의 반격을 하지 못한 데 대한 충무공에 대한 사죄의 민심이려니 했다.

한데 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검은 깃발이 아니라 검은 상자들을 여러 개 길쭉하게 연결시켜 대형 크레인에 매달아놓은 고성능 스피커였다. 축제의 음향효과를 위한 장치가 어쩌면 이 시점의 국민 감정을 대변하는 조기 구실을 했는지 희한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충무공은 외침으로부터 바다를 지키는 상징적 영웅이다. 임진왜란 때 남해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대소 선단이 충무공의 한계선 감시망에 넘어들기만 하면 여지없이 격침당했다. 명나라의 수군(水軍)사령관인 진도독(陳都督)이 어느 날 충무공과 더불어 술자리를 하고 있는데 도독의 부하인 천총(千摠)이 와 절이도(折爾島)에서의 전황을 보고했다. “새벽녘에 적을 만났는데 조선의 수군이 나오는 족족 다 잡고 명나라 수군은 풍세가 순하지 못하여 싸우지 못했습니다”라고. 화가 치민 진도독은 술상을 천총의 머리 위로 던졌다.

이에 충무공이 말했다. “장군이 천조(天朝)의 대장으로 바다 도적을 토벌하고 있으니 진중(陣中)에서 이기는 일은 곧 장군이 이기는 것입니다. 조선군이 벤 적의 목을 모두 장군에게 바치겠사오니 전선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데 북경 조정에 큰 공을 보고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했다. 큰나라에서 태어났다 해서 대인이 아니며,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어도 큰 일을 하고 공을 내세우지 않은 충무공이야말로 대인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 충무공은 세계사의 3대 해전 영웅으로 우러름을 받고 있으며, 그 피를 물려받았음을 자임하고 있는 해군이다. 요즈음엔 움직이는 동상이 있다던데 충무공상이 움직인다면 서해해전이 있던 날 바로 그 시간에 장군도(將軍刀)를 들었다 놓았을 것이다. 충무공상 앞의 「조기」는 그래서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만 같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