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정치부 차장 jhyang@chosun.com

왼손 손가락이 포탄 파편에 다 날아갔다. 오른 손 하나로 탄창을 갈아끼우고 왼손목으로 총열을 누르면서 사격했다. 자동포에선 두 병사가 방아쇠를 쥔 채 숨져 있었다. 두 팔에 파편이 박힌 채로 실탄을 다 쏴버리고 옆을 보니 전우가 죽어 있었다.

조타실에 있던 부사관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불탔다. 쓰러진 정장(艇長)은 아무리 인공호흡을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파편에 오른쪽 다리가 잘린 부장(副長)이 병사들을 지휘했다. 해군 제2함대 고속정 357함의 장병들은 그렇게 싸웠다.

그들 중 5명이 전사했다. 포탄에 몸이 찢기고, 화염에 불타고, 기관총탄에 관통당해 쓰러졌고,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살아남은 장병들의 눈물 속에 357함은 서해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들에겐 아무런 환호도 없다. 인기도 없다. 카퍼레이드도 없고, 축제도 없다. 그들을 위한 노래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의 유족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금강산 관광객들은 관광길에 나선다. 대통령은 조문하러 오지 않았고,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은 관례에 따라 영결식에 오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유족들에게 6000만원이 나온다. 거친 바다에서 살을 태우고 피를 뿌린 대가는 남편잃은 아내의 절망과 영문도 모르는 어린 딸, 그리고 6000만원이다. 아내에게 정식 결혼식도 올려주지 못했던 가난한 군인이 죽으면서 남긴 것은 그것이 전부다. 숱한 전투에서 숱하게 죽어간 그들의 선배들도 그랬다. 그것이 대한민국 국군의 숙명이다.

나라를 지킨다는 것,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 정신이 똑바로 박힌 군인의 가치를 모르는 나라에서 군인으로 죽는 숙명이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정치인들이 모르는 나라,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만 바보가 되면 그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두가 모르는 나라, 국민이 아니라 승진시켜준 정치인에게 충성하는 장군들이 지휘하는 나라의 군인들이 당해야 하는 숙명이다.

미국 하와이엔 미군 중앙신원확인연구소가 있다. 수십년 전 행방불명된 미군의 유골을 전 세계 끝까지 추적해 찾아오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베트남의 정글에서 손톱보다 작은 뼛조각을 찾아내 DNA 검사를 하고, 마침내 실종된 전폭기 조종사임을 확인하는 장면을 보았다.

장군들이 그 뼛조각과 성조기를 조종사의 부인과 성인이 된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엄숙한 행사가 뒤따랐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뼛조각과 성조기를 들고 “우리는 아버지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 자부심이 핵폭탄보다도 무서운 힘이 된다는 것,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미국의 정치인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전사한 군인들을 결코 잊지 않는다.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전사한 군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다. 미군 신원확인연구소는 지금 이 순간 북한에까지 들어가 실종 미군의 유해를 찾고 있다.

우리는 아마도 얼마 안 있어 2002년 6월 29일 서해바다에서 침몰한 해군 제2함대 고속정 357함을 잊을 것이다. 그 배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도 잊을 것이다. 그들의 유족은 힘겹고 가난하게 살아가면서 나라와 국민들로부터 잊혀져갈 것이다. 전사한 장병들과 357함은 국립묘지의 비석에만 외롭게 남을 것이다.

357함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돈도 명예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아내, 전우들, 부여받은 임무…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나라였다. 우리가 그들을 잊는다면 이 나라는 지켜질 수 없다.

진정 위험한 것은 이상한 햇볕정책도, 잘못된 교전수칙도 아니다. 군인들이 무엇을 위해 죽어야하는지 의심하고 회의하게 될 때 나라의 진짜 위기는 온다. 전사한 윤영하 소령,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실종된 한상국 상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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