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상
/미국 RAND연구소 객원연구원·전 국방대 총장

서해상에서 느닷없는 봉변을 당한 정부는 그 망신스러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언성만 높일 뿐 ‘대북 화해 협력 기조’의 기존 정책을 지속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내외 정세와 남북한 관계가 지금처럼 희망적일 때에도 이런 악의적 도발을 자행한다면 앞으로 북한의 도발 가능성은 문자 그대로 ‘상존’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또 다시 화해 정책을 위한 성급함 때문에 재발 방지를 위한 냉철하고 진지한 현실 분석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금할 수 없다.

정부의 태도를 가만히 보면 정부는 이번 사건이 북한 김정일의 뜻이 아니었다고 믿는 듯하다. 혹시 그것이 사실일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위협의 심각성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염려스러울 수도 있다.

이 중대한 사건이 일개 수병의 실수만이 아님은 명확하며, 적어도 상당한 수준의 군 고위층의 의지가 있었거나 아니면 북한 군부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해군의 교전 규칙이 선제 공격을 허용하고 있다면 이 역시 북한 군부의 도전적 분위기를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다.

그러지 않아도 그동안 북한 군부가 남북 관계 개선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과거 김일성만큼 북한 군부의 참된 충성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징조도 적지 않게 있었다. 이런 추측들이 일부라도 사실이라면 정부의 대북 정책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거의 모든 대북 정책을 김정일에 의지해 추진하려 드는 것부터가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에는 ‘평화정착’과 ‘화해협력’이라는 두 개의 축이 있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화해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적 도움을 얻는 데 관심이 있고, 한국은 화해와 협력을 통한 한반도의 평화정착이 주된 목표다. 이 두 축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 잘 굴러가야 남북 관계도 잘 풀려 나갈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중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 군사당국자 회담은 일찍부터 얼어붙어 있다. 한국 국민도 즐거울 수가 없지만, 선군(先軍) 정치체제하의 북한 역시 군부가 흥미를 갖고 참여하지 않는 한 남북 관계의 발전에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햇볕정책의 중요한 전술적 실책의 하나다.

더욱이 전통적으로 북한의 대남 정책은 이중적 접근법에 근거해 추진되어 왔다. 한편에서는 평화와 화해를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무력 적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쉼 없이 계속해 왔던 것이다. 이 서로 상반된 정책이 서로 다른 기구에 의해 서로 거의 방해 받지 않고 공존해온 것이 북한체제의 기이한 정책 수행 방식이었다.

그것을 통합 조정하는 것은 최고지도자의 몫이지만 전통적으로 이 기능이 원활하게 수행된 적은 그리 많지 않고, 오히려 그로 인한 한국측의 혼란을 즐겨온 인상이 짙다. 햇볕 하나로 모두 대응할 수 있는 성질의 싸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북 정책상 수없이 많은 수단 중의 하나일 뿐인 ‘햇볕’에만 매달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한·미관계를 비롯한 대외관계가 그렇고 국내에서도 시대착오적인 이념 갈등에 얼마나 국력을 낭비해야 했던가?

이러니 하나하나 따져보면 오로지 김정일에 의지한 햇볕 위주의 기존 정책은 이제 목표와 접근방법 등 모든 면에서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때임에 틀림없다. 민족적 대의에 입각해서 일단 한번 시도해 본 것까지는 좋지만, 이제는 하루 빨리 새로운 접근법을 찾는 것이 지도자로서의 양심에 맞는 지혜롭고 합리적인 길이 될 것이다.

서해 사건과 같은 비극이 또다시 반복되게 하는 것은 절대 지도자의 참된 도리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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