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正源·세종대 석좌교수·국제정치학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4강에 진출해 3·4위를 가리려는 축제의 아침, 우리 영해에 침범한 북한군에 의해 27명의 대한민국 군인들이 살상되고 고속경비정이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자랑스럽게 ‘대~한민국’을 연호하던 국민들과 한민족의 저력을 칭송하던 세계는 경악했다.

6·29 서해 만행은 냉엄한 정전상태를 간과하고 군을 정치화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햇볕정책으로 한반도 안보를 지킨다는 김대중 정부의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과연 북한의 본심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9·11테러 이후 전 세계의 군과 안보기관은 사실상 비상이 걸려 있었다. 특히 월드컵은 세계인의 축구 잔치인 동시에 국제 테러단체나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농후한 행사여서 안보적 초긴장 상태였다. 북한은 각종 대북지원을 받으면서도 지난 6개월 동안 11번이나 경비정이 서해의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내려왔으며 6월에만 6번이나 침범했다.

그런데도 우리 군은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북한은 끊임없이 암시를 주었는데도 경고방송과 밀어내기 중심의 ‘햇볕정책식 교전수칙’을 고수했다. 국민의 혈세를 들여 구입한 최첨단 장비를 가지고서도 ‘무방비 상태에서 선제공격’을 당한 것은 6·15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의 샴페인에 취해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군 수뇌와 청와대의 정치적 판단 때문이다.

북한당국은 시기적으로 미국 특사의 방북이 임박한 상황에서 치밀한 계획 하에 보란 듯이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사태 수습은커녕 군사정전위원회에 NLL 제거를 주장하면서 장성급 회담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 동시에 남북한 현상유지의 확고한 법적 근거인 1953년 정전협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 국방장관 회담 등 제반 합의를 무시하면서 한반도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남북한 긴장국면 조성 이외에도 북·미 관계, 북·일 관계 등 동북아 안보에 미칠 파장이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현 정부의 대응자세다. 정부는 군사적 수단에 의한 ‘확전 반대’에 집착한 나머지, 북한에 대한 다른 제재·통제 수단을 포기하고 있는 듯하다. 일단은 교전이 중단된 상태이므로 유엔군 사령부를 통한 장성급 회담에서 사태수습을 하는 것이 순서다.

그러나 북한이 끝까지 거부할 경우에는 자산동결, 경협 중단과 같은 경제적 수단과 외교적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특히 경제적 수단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엄청난 타격을 안겨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예컨대 한·미·일의 대북 지원과 금강산 관광사업 등의 경제협력 방안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거나 중단할 경우, 북한에 실질적인 손실을 주고 한국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피력할 수 있다. 또한 북한이 도발을 계속하거나 사태 수습을 외면할 경우에 대비한 대북정책의 전면 재검토 작업도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햇볕정책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을 서둘러 공식 발표했다. 500여명의 민간인을 실은 금강산 유람선도 예정대로 북한으로 보내어, 우리가 쥔 카드를 스스로 폐기해 버렸다. 심지어 국군 최고통수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에 참석해 축구관람에 열을 올리느라 전사자들의 영결식조차 지켜보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정부 당국자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확전이 무서워 북한 함정을 격파할 수도 없고, 금강산 관광조차 중단할 수 없다면, 남한의 날조극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을 상대로 어떻게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받아낼 것인가. ‘대북 퍼주기’의 결과에 분노하는 국민여론을 외면한 채 햇볕정책만을 두둔하며 국민을 희롱할 것인가. 국민들은 대포를 앞세우고 위협하는 북한 정권을 믿는 정부를 결코 신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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