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우리 해군이 많이 성장했지만 해군사(史)에는 눈물 없이 읽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건국 초 해군을 창설했지만 함포가 달린 군함이 한 척도 없었다. 1950년 4월 해군장병과 국민이 성금을 모아 3인치 포가 달린 백두산호(PC-701함)를 도입함으로써 해군은 군함다운 군함을 한 척 갖게 됐다. 701함은 6·25 남침 바로 그날 유명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1950년 6월 25일 밤 38선 경비를 위해 긴급출동에 나선 701함은 대한해협 공해를 통과 중인 1000t급 괴선박을 추적해 이를 격침시켰다. 이 배에는 600여명의 북한군 게릴라가 타고 있었다. 이 병력이 부산 등 후방에 침투했더라면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해군은 미군이 넘겨준 호위함으로 북한의 도발에 맞서면서 또 한편으로 ‘평화선’을 지켜야 했다.

▶그러던 중 당포호(PCE-56함)가 북한 해안포에 의해 격침되는 일이 발생했다. 1967년 1월 19일, 56함은 동해 북쪽 해상에서 명태잡이를 하던 우리 어선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56함은 우리 영해 내에 있었음에도 북한의 해안포대가 별안간 불을 뿜었다. 56함은 순식간에 침몰했고 장병 39명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우리 정부와 유엔군사령부가 항의했지만 북한은 56함이 자기네 영해를 침범했다는 등 생떼를 늘어놓았다.

▶56함 사건을 계기로 해군력 증강의 필요함이 인식됐고, 이에 구축함이 추가로 도입됐다. 70년대 초부터 백령도 등 서해 5개 도서와 북방한계선을 지키는 일이 해군의 중요임무로 등장했다. 1976년 8월,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미군장교를 도끼로 찍어 죽이는 일이 발생하자 서해에도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당시 우리 군의 태세는 분명했기 때문에 북한군은 감히 우리 함정에 대들지 못했다. 80년대 들어서 해군은 신예 국산호위함을 도입하는 등 첨단전력을 확충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햇볕정책’이 교전수칙을 묶어놓는 시대가 왔다. 이제 북한 해군력은 우리 해군의 상대가 안된다. 하지만 선제공격을 당할 때까지 꼼짝말고 있으라는 작전명령을 받고 있으니 첨단군함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권과 국군 지도부의 환상 때문에 우리 해군 장병들이 희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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