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斗植
/ 논설위원 dspark@chosun.com

“도대체 한국 정부는 뭐하고 있느냐?”
“한국의 자존심을 찾아야 한다.”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중국 타도’ 특집 기사를 다뤄달라.”

지난 13일 중국 공안이 한국대사관에 강제 진입, 탈북자 원모(56)씨를 연행하고 한국 외교관들을 폭행한 사건이 알려진 뒤 조선일보 독자서비스센터에는 노성(怒聲)들이 쏟아졌다. 이들은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약’이니 ‘외교적 비호권(庇護權)’이니 하는 어려운 말들에는 별 관심이 없다. 중국 공안의 야만적 행태를 목격하고,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평범한 상식에서 터져나온 분노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국민들의 ‘상식과 분노’를 함께 공유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사건 발생 후 닷새 동안 한국 정부가 한 일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 외교통상부 대변인이 자신 명의의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외교부 차관이 리빈(李濱) 주한 중국대사를 불러 ‘항의’했을 뿐이다. 현지 한국대사의 중국 외교 부부장(차관) 면담 신청은 외유 중이라는 이유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후속 대책에 대해서는 “우리의 항의에 대한 중국측 반응을 기다리겠다”는 믿기지 않는 답변뿐이다.

한국 외교는 과거부터 특정 외교 목표가 주어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관련국과 국제기구들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 수십년간 한반도와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국제기구나 단체들까지 한국 문제를 언급하곤 했던 것은 바로 이런 노력(?)들 때문이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들어서도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알리기 위해 130여개에 달하는 한국의 재외공관들은 얼마나 분주했던가?

그러나 ‘6·13 베이징 사태’와 관련해서는 이런 노력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유엔 등 국제기구는 물론, 관련 당사국과의 협의에서조차 탈북자 문제가 진지한 의제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거꾸로 한동안 침묵하던 북한이 조만간 중국에 대표단을 보내 탈북자 대책을 논의할 것이라는 외신 보도는 우리 정부의 무기력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한 외교관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 외교는 현재 어떤 판단과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심리적 유보’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한다. 그는 “이번 베이징 사태의 심각성과 탈북자 문제가 갖고 있는 ‘잠재적 폭발성’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외교관은 우리 외교 수뇌들이 계속되는 탈북자들의 망명 기도를 껄끄럽고 부담스럽게 여기는 상황에서 일선 외교 현장은 눈치만 볼 뿐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관료들을 감시할 국회마저 ‘식물 상태’에 빠져 있다.

상대편이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탈북자들이 다른 외국 공관에 들어갔을 때와는 달리 유독 한국대사관에 대해서만 물리력을 동원한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중 수교 10년의 경험 끝에 한국은 충분히 ‘찍어 누를 수 있다’는 판단이 섰고 이런 판단 아래 최근 탈북 러시의 흐름을 여기서 다잡으려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외교는 첫 대응부터 실기(失機)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 사회는 냉혹하다.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이 부시 정부 내에서 입지가 튼튼하지 않다는 수근거림이 있자, 곧이어 ‘사퇴설’이 나도는 게 국제 사회의 이목(耳目)이고 인심이다. 그런 국제사회에서 ‘두들겨 맞고도 항의 한번 제대로 못하는 한국 외교’가 제대로 대접받을 리 만무하다. 사건 발발 직후 미국과 일본 등이 ‘이성적인 해결’을 주문한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에서 한국의 과열 대응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외교는 그 같은 ‘우려’를 보기좋게 배신한 셈이다.

한국 외교의 ‘동면(冬眠) 상태’는 그 출구가 쉽게 보이질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대북 편집증 때문인가. 어쩌면 당분간 ‘외교 모라토리엄(일시중지)’이라도 선언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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