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와 ABC방송 등 미국의 주요 매체들이 탈북자들의 처절한 상황과 생존투쟁 모습을 생생하게 미국민의 안방에까지 전달하고 있는 것에 때맞춰 미국 하원은 중국정부에 탈북자들의 망명을 허용하고 북한송환을 중단하라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베이징(北京) 주재 모든 외국공관에 들어간 탈북자들의 신병인도를 요구키로 해 지금까지보다 더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미하원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미국 여론을 반영하고 있어 앞으로 대북(對北)·대중(對中) 정책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중국정부의 입장변화는 탈북자 문제가 계속 국제사회 이슈로 확대되는 것을 억제하겠다는 고육책으로 여겨지지만, 반(反)인도주의적이라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작금의 연이은 탈북자 관련 사태진전이 의미하는 것은 이 문제가 이미 확고한 국제적 현안으로 자리잡았으며, 이를 둘러싼 관련국들의 이해관계가 갈수록 복잡하게 얽혀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90년대 초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 벌목공들의 탈출사태를 계기로 부각되기 시작한 탈북자 문제가 근본적 대책없이 10년간 누적되면서 이제 더이상 임기응변적인 대응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단계를 맞고 있는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지금도 압록강·두만강을 넘는 탈북행렬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체제의 대규모 변화 없이는 이 행렬을 막을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국제법과 관례를 따지고, 인도주의 정신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탈북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도 자명하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정치적 지형(地形)을 뒤흔들어 놓을 거대한 ‘흐름’은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이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고 대처하는 통찰력과 의지, 용기와 결단이 절박한 시점이지만 우리사회 어디서도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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