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
/1973년 평양 출생. 97년 탈북. 연세대 법학과 재학

북한에서 아리랑축전이 한창이라고 한다. 고등중학교(중고교) 3학년때까지 나도 죽 집단체조에 참가했다. 10kg이상 되는 카드섹션 책을 매고 다니던 일, 동작 실수로 부모들이 학교로 불려가 밤새 사상투쟁 회의에 시달려야 했던 일, 소낙비에 얇은 운동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드러나는 신체를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던 일, 뙤약볕에서 물구나무서기 훈련을 계속 하다보니 머리에 하얗게 이가 달라붙어 어머니가 울상이 된 채 밤새 무릎에 눕혀놓고 잡아주던 일...

점심시간은 그래도 신이 났다. 학부모들이 교대로 국과 밑반찬을 해서 훈련장을 찾아왔다. 한 번은 우리 어머니가 찰떡을 해 가지고 온 덕분에 나는 모범학생으로 추천을 받기도 했다. 힘든 훈련이 끝나면 100g짜리 식빵 1개씩을 간식으로 나눠주었다. 여학생들 중에는 그 빵을 먹지 않고 집에 가져다 동생들에게 주는 학생도 있었다.

김부자가 나오는 1호행사가 있는 날에는 남녀 구별없이 얼굴에 화장을 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화장이 잘 받지를 않아 선생님들은 아예 「미장」을 해주곤 했다. 1호행사가 있는 날은 모두 새옷으로 갈아입힌다. 경찰과 정보요원들이 경기장을 2중 3중으로 경비하는데 얼마나 긴장되는지 모른다. 행사가 시작되면 주석단을 향해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른다. 김일성, 김정일이 손을 흔들어 화답해주면 그동안의 온갖 힘들었던 일들이 잊혀지고 감격의 눈물이 흘러나온다. 행사가 끝나면 사탕과자 1kg 등 선물이 지급되었다. 기뻐서 춤추던 모습이 지금은 부끄럽다. 사탕과자 1kg에 그렇게까지 감격하다니!

그날 행사를 위한 우리의 고생은 형언할 길이 없다. 김일성ㆍ김정일이 참석하는 1호행사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시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우리들은 새벽부터 학교에 모여 경기장까지 50리를 뛰다시피해서 도착했다. 아침 7시30분쯤에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간다. 무거운 기자재를 들고 오전 내내 뜨겁게 내려 쬐는 햇볕을 받으며 콘크리트 바닥에서 훈련해야 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갔던 우리는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두 소변이 피오줌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그 날 주차장 바닥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소나기가 퍼부었다. 피할 곳도 없이 빗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함께 고생했던 친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겁다. 어린 학생들은 동작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손찌검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들 어린 학생들이 바로 집단체조에서 핵을 이루는 「어린이」장(章)을 장식한다.

쓰러지는 학생들도 종종 나타난다. 1호행사가 끝나기 전에는 쓰러지면 안 된다고 외치면서 약을 먹고 참는 학생들도 있다. 어떤 보수나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지금 대집단체조 「아리랑」에 참가하는 고향 후배들에게 진심어린 격려를 보낸다. 관중석에 앉아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어찌 그들의 고통을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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