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普植

“혁명 역사에서 또 한차례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던…”. 작년에 조선중앙TV를 통해서 방영된 ‘자강도 사람들’이라는 북한 영화의 내레이션은 비장하다. 피눈물 나는 역경을 뚫고 당(黨)에서 부여받은 발전소 건설의 과업을 완수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식량난에 허덕이는 영화 주인공들은 눈보라 속으로 ‘니탄’(泥炭)을 캐러 떠난다. ‘니탄’이란 땅속에 묻힌 풀뿌리 등이 완전히 석탄이 되지 않은 상태다. 땔감을 찾는 것일까? 그러나 영화에는 “니탄을 그냥은 먹기 어렵지만 옥수수 가루를 반반씩 섞으면 먹을 만하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또 식탁에 ‘가둑지짐’, ‘나치가루떡’, ‘뽕잎죽’, ‘뽕잎지짐’, ‘니탄가루빵’, ‘니탄가루국수’등을 차려놓고 음식 품평회를 하는 장면도 있다. 영화가 현실을 꼭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달 전 WFP(세계식량계획)의 데이비드 모튼 평양주재 대표는 본지에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북한 주민들은 국제기준 최소 식량(500g)에 훨씬 못 미치는 300g의 배급을 매일 받았다. 이 달부터 250g으로 줄었다. WFP는 올해 유엔 회원국들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노인과 고등중학교 학생들에게는 배급을 중단했다. 임산부와 산모들을 우선적으로 배급 대상에 포함했다. 산모들의 영양 실조로 체중 2.5㎏ 미만의 아이들이 많이 출생하고 있다.”

북한에서 100만명이 굶어죽을지 모른다는 설이 다시 나오고 있다. 굶어죽는 이에게 양식을 주는 데 거창한 명분과 도덕심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필부(匹夫)의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따금 망설이는가.

굳이 책임 소재를 따지면 북한에게는 주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식량통계를 내놓지 않았고 굶어죽은 이들의 숫자를 밝힌 적이 없다. 기아(飢餓)의 참상을 담은 사진을 공개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진들은 북한에서 활동하는 국제기구 직원들을 통해 흘러나왔을 뿐이다.

‘체면’이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인가. 북한은 바깥으로 손을 벌릴수록 자존심에 더 매달리고 있는 것 같다. 몇년 전 한 대북 지원단체가 북한 주민들에게 지원물자가 돌아가는지에 대한 모니터링을 했다. 그때 북한의 한 간부는 “쌀이 떨어져 형제에게 쌀을 도와줬으면 됐지, 그 쌀로 떡을 해먹든 죽을 쑤든 시시콜콜 물으며 생색내지 말라”고 큰소리쳤다고 한다.
받는 자의 기분이 무시돼서는 안 될 것이다. 거꾸로 주는 자의 입장도 존중돼야 한다. 그게 세상 이치다.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해 낸 성금이 군량미로 전용되지 않을까 하는 우리 중산층의 불안감을 북한이 모를 리 없다.

세월 앞에는 변하지 않는 게 없고,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평양을 30여 차례 다녀온 한 활동가는 “북한 사람들은 조건 없이 남에게 베푼다는 걸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 북측 관리로부터 최근 “당신들은 한말(韓末) 궁핍한 백성을 도왔던 선교사 알렌과 아펜젤러가 했던 일을 하고 있는가? 주민에게 돌아갈 몫을 빼돌릴 만큼 비양심적은 아니다”라고 들었을 때, ‘어?’하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우리를 고무시킬 게 틀림없다. 지금 북한주민들은 굶고 있다. /사회부 차장대우 cong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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