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호
/논설위원 겸 통한문제연구소장 hhkim@chosun.com

현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다음 정권에서도 계속될 전망이다. 민주당의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현 정부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받거나 또는 포용의 강도를 더욱 높일 태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 역시 상호주의와 검증을 강화하되 포용정책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북한의 긍정적 변화를 유도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포용정책의 원칙과 철학은 시대적 당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한나라당이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안보·국방·국가 정체성의 3대 불안을 초래한 ‘실패작’으로 규정하면서도, ‘포용정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도 여기에 담긴 정신과 전략적 기조를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후보 모두 포용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겠다고 하지만 구체적 내용을 들여다보면 물론 차별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회창 후보가 북한의 변화를 검증해가면서 지원을 하겠다는 입장이라면, 노무현 후보는 ‘선(先) 지원 후(後) 변화’ 쪽이다. 이는 단순히 방법론상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정책의 존폐와도 직결될 수 있는 문제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둘러싼 논란도 원칙이 아니라 방법과 속도에 관한 것이었다.

지난 5년간의 경험에서 우리가 적잖은 비용을 치르면서 얻은 교훈은, 포용정책이 목표로 삼고 있는 북한의 긍정적 변화는 우리의 지원 강도보다는 북한 체제의 본질과 정권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북한 체제와 그 지도부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국민적 합의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책이 먼저 추진됨으로써 북한의 본질적 변화보다는 우리 내부의 혼란을 더욱 자초한 것이다.

북한 체제의 본질에 대한 파악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방북자가 8551명(금강산관광 제외)이었고, 국내 탈북자도 2000명에 육박한다. 객관적 정보나 연구도 넘쳐난다. 그런데도 북한체제의 기본적 인식에서 여전히 상반된 주장들이 엇갈리고 있는 것은 어떤 편견이나 목적이 개입돼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니면 관심이나 노력 부족 탓이든가. 여기서 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일은 정치권의 몫이다.

인식이 같더라도 정책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전후 서독 사민당을 재건한 쿠르트 슈마허는 대표적 좌파 정치인이었지만 “공산당은 붉은 칠을 한 나치스”라며 동독 정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단호했다. 반대로 대표적 우파 반공주의자였던 슈트라우스 기사당 당수는 동독에 20억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하는 데 창구 역할을 자임했다. 이념적 성향이 다를지라도 동독의 현실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에서 두 사람은 다르지 않았고, 같은 인식 위에서도 그 현실을 바꾸려는 정책에 있어서는 때로 다른 역할을 맡으면서 통일의 길을 열어갔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 대북정책을 이념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진보라고 해서 대북 유화책만을, 보수라고 해서 강경책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거꾸로 대북 유화책을 진보적, 강경책을 보수적 정책으로 구분하는 도그마도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북한 체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보수든 진보든 기본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이 토대 위에서 대북정책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논쟁은 국민들에게 유쾌한 긴장감을 줄 수 있지만, 그런 토대가 없다면 공허한 색깔 시비와 우리 내부의 분열만을 자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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