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반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무엇일까? 뭐니뭐니 해도 갈수록 추세화하고 치열해지고 있는 대규모 탈북(脫北) 사태일 것이다. 하나의 정권, 체제, 국가로부터 수많은 주민들이 떼를 지어 탈출한다는 것은 그 정권, 체제, 국가로서는 그야말로 파천황(破天荒)의 대사변이 아닐 수 없다. 북한 ‘인민’들의 탈출은 더군다나 스스로 ‘인민의 체제’라고 자처하는 곳으로부터의 필사적인 엑소더스다. 따라서 그것이 북한 권력층에 주는 정치적·도덕적 타격은 가히 치명적인 것이며, 문자 그대로 국가적·체제적 정당성의 위기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담론들은 그 중차대한 추세를 논의의 중심부에 두지 않고 한낱 주변부로 밀쳐놓고 있다. 정부는 그것을 애써 못 본 체하고, 지식인들은 그것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거북스러워하고, 시민운동은 주로 우리 내부 쟁점에 몰두해 있다. 북한 권력층을 상대로 남북화해를 추구하는 마당에 탈북자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는 것은 ‘반통일적’ ‘수구 냉전적’ 발상이라는 시각도 있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노파심과 충정이 전혀 없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과거 동독주민들에게 철조망을 열어주어 그들의 탈출을 도왔던 헝가리 정부나, 그 탈출 동독인들의 정착을 위해 애쓴 서독 국민과 정부는 그렇다면 ‘반통일’과 ‘수구’의 화신이었다는 말인가?

물론 오늘의 남한은 그때의 서독만큼 안정되고 풍요로운 나라가 아니니까 북한 탈출자 문제를 동독 탈출자 문제에 그대로 대입시킬 수만은 없는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굶어죽지 못해 도망나와 유리걸식하는 동포난민들을 두고서 그들의 고통을 논의의 전면에 내세우자고 하면 ‘반통일·냉전적’이고, 그렇게 하지 않아야 ‘통일·탈냉전적’이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실존의 문제를 외면하는 교조적 고정관념이라 할 수밖에 없다.

진실은 현실 속에 있는 것이지 관념이나 이론 속에 있지 않다. 특정한 관념과 이론이 “이것이 통일적이다” “저것이 반통일적이다” 아무리 입맛대로의 지도를 그려도, 그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현실의 봇물이 터져 홍수가 나고 사태가 나면 그 알량한 지도는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런데 그 봇물이 살금살금 새더니 이제는 자못 괄목할 만한 국제적 이벤트로 질적(質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탈북추세가 이런 식으로 계속 큰 물줄기를 이루어 간다면 ‘탈북자 문제 적극거론=수구 냉전적’이라는 도식적인 ‘이론’은 하루아침에 ‘현실’의 홍수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 것이다.

탈북자 문제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물론 관련국들을 포함해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짜내야 할 과제다. 그러나 탈북자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가치판단과 인식의 문제가 지금으로선 더 절박하고 절실하다. 탈북자 사태의 본질은 너무나 자명하다. 한마디로 우리가 북한주민들을 굶어죽는 상황에서 도와주어야 하고, 탈북자들을 죽음의 강제송환에서 구출해내야 하게끔 된 것이 54년간의 남북 노선(路線)실험의 결론이라는 사실이다. 이로써 더 이상 구구한 ‘이론’이 부질없고 복잡한 말이 필요없다. 오늘의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결국 평양 권력층이 유기(遺棄)한 북한주민들의 기아와 인권참상의 고통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것을 위해 시민사회는 정부보다 훨씬 자유로운 입장에서 탈북자 문제의 국제적인 ‘인정(認定)투쟁’을 위해 가능한 모든 활동양식을 개발해야 할 시점이다. 북한의 기아민들에게는 구휼식품과 의약품을 계속 성의껏 보내주고, 탈북자들의 생존권을 위해서는 예컨대 독일인 의사 폴러첸 앞에서 우리가 부끄럼 없이 설 수 있어야 하겠다.

젊은 시절에 체 게바라를 흠모했다는 진보적 사회운동가 폴러첸은 자신의 탈북자 지원활동이 한국사회 일각에서는 ‘수구’로 낙인찍히는 데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학대받고 쫓기는 나그네들에게 구명(救命)의 밧줄을 던져주는 것보다 더 진짜 진보가 어디 있겠는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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