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낮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열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연례총회를 기분 좋게 끝낸 찰스 카트만(Kartman) KEDO 사무총장이 KEDO의 잭 프리처드(Pritchard) 미국 대표(대북교섭담당 대사 겸직)와 한국·일본·EU(유럽연합)의 대표들과 함께 점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점심 장소는 총회가 열린 아시아 소사이어티 빌딩에서 한 블록 떨어진 이탈리안 레스토랑 2층. 따뜻한 봄 햇살에 걸음걸이도 가벼워 보였다.

일행은 약속시각(12시30분)보다 5분 일찍 도착했다. 15분 뒤 박길연 유엔주재 북한대사의 리무진이 레스토랑 앞에 멈췄다. 전일 저녁 연례총회 리셉션에는 초청을 받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던 박 대사가 여기엔 나타난 것이다.

잠시후 레스토랑 2층. 박 대사가 카트만 총장 등 각국 대표들과 어울려 환담을 나누고, 프리처드 대사는 약간 떨어져 있었다. 그와 박 대사가 마주한 장면을 사진 찍을 생각으로 프리처드 대사에게 각국 대표들과 합류하도록 권했더니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는 1층으로 내려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예고없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기자가 떠날 때까지 2층으로 올라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다른 모임에서는 한국 언론에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던 박 대사는 의외로 가만히 있었다.

조만간 북한을 방문할 미국 대사가 사진 하나 안 찍히려고 이토록 민감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저런 상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다가 한 외교관으로부터 “미·북 대화는 아직 시작도 못한 상황인데, 그런 사진으로 마치 미·북 관계가 잘 풀리는 것처럼 비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귀띔을 듣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미·북 대화는 설령 시작되더라도 정말 갈 길이 멀겠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장면이었다.
/ 金載澔·뉴욕특파원 jaeh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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