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를 러시아어로 풀이한 ‘한·노(한·로)사전’이 한말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 이후 110여년 만에 우리 손으로 처음 출간됐다. 한국외국어대 노어과 강덕수(강덕수)·김현택(김현택) 두 교수의 8년 작업 끝 결실이다. 사전의 완비는 국가간 문화 교류의 진정한 출발을 알릴 만큼 중요한 학문적 작업으로 평가 받는다.

강·김 두 교수는 20일 “연구비나 지원이 없어 못한다고 하는 상황이었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고 그냥 몸으로 부딪치길 작정하고 시작한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전 편찬 지원에 나서는 단체도 없었다. 러시아어 전공자들 사이에는 80년대 말 이후 러시아와 북한에서 발간된 ‘조·노 사전’(87년) 불법 복사판이 공공연히 유통됐다. 10여년전 1만5000원 정도에 거래되기 시작한 이 사전은 한 러시아어전공자의 말을 빌자면 “학생들 사이를 무지막지하게 파고 들었다. ”

최초의 ‘한·노사전’은 ‘최초’라는 의미 말고도 몇 가지 중요성을 갖는다. 강·김 두 교수는 93년 첫 작업 시작 후 4~5년을 윌슨 편(편) 영·러 사전(82년)을 해체하는 데 할애했다. 영어 단어 하나하나에 러시아어 단어를 결부시키며 색인화하는 작업이었다. 강 교수는 “기존의 한국어·외국어 사전들이 주로 일본의 외국어 사전을 기본으로 만들었을 것”이라며 “그런 경우 사전 편찬자는 일본어에 의해 우리말의 상상력을 제한받을 위험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 하나 ‘조·노 사전’의 표제어는 5만 단어에 불과했지만, ‘한·노 사전’은 8만 표제어를 수록했고, 컴퓨터·경제·경영 용어를 포함한 다양한 전문용어를 망라했다. 또 작문의 편이를 위해 관용적 표현도 대폭 수록했다. 마지막 단계에서 외국어대에 재직 중인 러시아인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한글과 러시아어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쏟았던 노력도 미덕이다. 강 교수는 “‘조·노사전’ 편찬의 핵심으로 러시아의 한국어 대가인 모스크바대 유 마주르 교수(98년 작고)의 도움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마주르 교수는 87년 ‘조·노사전’ 편찬 후 정리했던 어휘 색인들을 강 교수에게 주었다고 한다.

두 교수는 외대 노어과 72학번(강 교수), 74학번(김 교수) 선후배 사이. 학부 시절엔 노문학회 동아리를 함께 꾸렸고, 이후 시차를 두고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했다. ‘한·노사전’(진명출판사) 발간은 그래서 두 교수가 나눈 오랜 학문적 우정의 결실이기도 하다. 23일 오후 7시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있다.

/이지형기자 jihy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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