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9일 김대중(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T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남북문제를 풀어나가는 데는 김정일과 얘기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전제하면서 김정일은 ‘지도자로서의 여러 가지 판단력이라든가 식견이라든가 이런 것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고 말했다. 다소 놀라운 발언이다. 그동안 대한민국 국민이 들어온 내용과는 정반대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 국민을 청중으로 생각하고 그런 발언을 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평양에 있는 한 사람의 청중, 그러니까 김정일 총비서를 대상으로 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과연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이 역대 남한 통치자들과는 달리 김정일 자신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도자’로서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은 그만큼 남쪽이 남북대화, 특히 남북정상회담을 강하게 원하고 있는 증거라고 판단하고 있을까.

북한은 김대중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이 방송되던 바로 그날 러시아와 새 우호협력조약에 조인하고 있었다.

지난 1월에는 중국이 외상(외상)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도 외상을 평양에 보낸 것을 보면 김정일은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김정일은 중-러보다도 미-일이 평양을 향해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면서 더욱 만족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은 김정일 총비서가 그의 고위급 보좌관을 워싱턴에 보내주도록 설득하기 위해 식량지원은 물론 북한이 원하는 대로 대북 제재를 해제하는 데 대해서도 협조할 뜻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일본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식량지원을 재개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다. 그뿐 아니다.

최근에는 유럽,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까지 김정일 정권을 인정하는 대열에 줄을 서듯이 북한의 국제환경은 크게 호전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김정일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두 가지 상반되는 판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북한이 흔들림 없이 강하게 나갔기 때문에 남한은 물론 미국, 일본 등 많은 나라들이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일 북한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 편에서 부드럽게 나가면 나갈수록 북한은 더 강경한 자세로 나올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능한 해석은, 한국과 미국 모두 강한 북한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만일 북한이 전쟁을 도발하든가 김정일 체제가 붕괴된다면 북한은 멸망하겠지만 한국에도 손실과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전에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대북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첫째 해석은 북한 사람들의 자존심에는 만족스러울지 모르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고, 둘째 해석은 사실과 일치하지만 북한측으로서는 인정하기 힘든 관점이다.

만일 김정일 총비서가 진정으로 ‘판단력’과 ‘식견’이 있다면, 듣기좋은 상황판단에 현혹되지 말고 자신이 놓여있는 처지를 있는 사실 그대로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후자이기를 바랄 뿐이다.

/사회과학원장·고려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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