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사장집 딸 ‘강혜나’(25)는 런던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있다. 그녀는 아일랜드 출신의 IRA(아일랜드공화국군) 소속 테러리스트 ‘숀’을 사랑하게 된다. 역사적 질곡과 그 비애 속에 파묻혀 저항의 신념을 불태우는 IRA 테러리스트와, 부족할 것 없이 자라나 풍족한 유학생활을 즐기고 있는 한국 처녀는 얼핏 커다란 사선으로 비켜갈 것 같은 삶이다. 중견작가 윤정모(윤정모·54)가 영국 생활 3년 만에 내놓는 장편 ‘슬픈 아일랜드’(전2권,열림원)의 주인공들이다.

아일랜드와 한국은 많이 닮았다. 인접 강대국의 찬탈과 비극의 역사가 비슷하다. 남자들은 전장에서 쓰러지고, 마을엔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썩은 감자를 캐먹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죽어가는 19세기 아일랜드의 농민들은 시공을 넘어 오늘날 북한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소설 도입부는 서스팬스로 숨막히는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혜나’는 종강 파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공원 숲속에서 달빛에 홀리고, 낯선 괴한들에게 끌려가 강간 당한다. 근처를 지나던 ‘숀’이 ‘혜나’를 구하고, 자신이 한때 은거했던 곳으로 옮겨다 놓는다. 의식을 잃은 상태였던 ‘혜나’는 그를 가해자로 오해하기도 하고, 혹시 북한을 지원하는 국제 테러범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한다.

윤정모는 역사학자, 르포 기자의 체취를 소설 곳곳에서 물씬 풍긴다. 자료 수집과 역사적 사실의 추적, 그리고 끈기있는 취재의 흔적이 갈피갈피 배어 있다. ‘북아일랜드’는 20세기 후반 가장 뜨거운 단어 중 하나였다. 저항과 테러와 종교적 갈등과 역사적 구원(구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땅이다. 영화 ‘크라잉 게임’, ‘데블스 오운’에 등장했던 젊은 배우들의 애수에 젖은 푸른 눈동자가 겹친다.

아일랜드도 한국 처럼 이산가족이 많아서 일찍부터 사람찾는 프로그램이 발달돼 있다. 더블린 대학은 사람을 찾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고, 미국 교민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2권56쪽)

윤정모는 작중 소설가 ‘오후일’이라는 인물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조지 L. 쇼’라는 실존 인물의 흔적을 쫓는다. 그는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에도 묘사돼 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우리에게 맨먼저 독립자금을 준 사람”이라고 밝힌 바 있다. 김구가 중국으로 망명했을 때 압록강에서 배를 태워준 이다.

잊혀져서는 안되는 역사가 시종 작가의 뇌리에 버티고 서 있다. 오랜 인고의 세월에 대한 관심이 ‘동양의 아일랜드’라고 불리웠던 고국에 대한 애정과 교직돼 있다. 작가는 아일랜드 역사를 통해 이를 추적한다. 푸른 눈 테러리스트와 한국 패션 디자이너와의 사랑이 윤정모 특유의 건조한 관능으로 흐르고….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