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이산가족들의 만남으로 한반도가 온통 눈물에 잠겨있을 때 기자는 중국 푸젠(복건·복건)성 남단 항구도시이자 경제특구인 샤먼(하문·하문)시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 남쪽 해안은 타이완(대만·대만)의 ‘최전방’이랄 수 있는 진먼다오(금문도·금문도)와 불과 4.6km 떨어졌으며 타이완 무역항인 가오슝(고웅·고웅)과는 165해리 떨어진, 중국과 타이완간 ‘분단(분단)의 현장’이다.

1949년 국민당 장제스(장개석·장개석) 군대가 공산당 마오쩌둥(모택동·모택동) 군대와 마지막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타이완으로 패퇴해 나간 곳이자, 1958년 금문도 사건으로 포탄이 요란하게 오갔던 바다가 여기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해안선을 따라 시원하게 뚫린 8차선 순환도로(환도로) 양편이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타이완땅 진먼다오를 정면으로 보는 곳에는 지난 7월 완공된 샤먼 컨벤션센타(국제회의전람중심)가 우뚝 서있고, 나란히 전망대 조각상 꽃밭 해수욕장 심지어 놀이공원‘타이완 민속촌’까지 들어서있다. 우리로 말하자면 휴전선 이북 북한 땅에 ‘한국 민속촌’이 자리잡고 있는 격이다.

긴장과 살벌함 대신 연인들과 가족들이 몰려와 놀며 사진찍기에 바빴다. 굳이 분단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것은 타이완을 바라보고 서있는 ‘일국양제(일국양제) 통일중국(통일중국)’이라 쓰여진 붉은 색 대형 입간판이 고작이다. 철책과 중화기로 무장된 우리의 휴전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과거 살벌한 냉전(랭전) 기간중에도 샤먼은 타이완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가난한 푸젠성 사람들이 너도나도 부유한 타이완으로 밀항해 가 노동자 식당종업원 호스테스 사우나 안마사등 사회 하층에서 일하면서 번 돈을 고향에 송금했고, 타이완인들도 대륙(대륙)에 둔 친척의 궁핍함을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 각기 ‘한개의 중국’을 외치던 양쪽 정부는 완고하긴 했지만 이러한 민초(민초)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못본 척 했다.

중국과 타이완간에 민간교류가 본격화된 결정적 계기는 1978년 덩샤오핑(등소평)의 개혁·개방노선으로의 전환이었다. 이때부터 타이완 사람들과 기업들은 대륙의 창(창)격인 샤먼으로 몰려들어 공장을 짓고 사업을 시작했으며 샤먼 주민들은 그들의 투자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등 상부상조(상부상조)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15년 전인 80년대 중반부터는 대만에서 대륙의 혈육을 찾아가는 탐친(탐친)이 허용돼 지금은 거의 자유왕래가 허용된 상태다. 중국인들중에는 중국 정부가 신경을 쓰는 가운데 타이완에 건너가 아예 눌러앉는 사례도 적지 않으며, 타이완인들은 거의 자유롭게 중국을 드나들고 있다.

이들은 출입국시 여권(passport) 대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회향증(회향증)’을 중국 관헌에게 보여준다. 비록 타이완·중국간에 직항로가 개설되진 않았지만 비행기는 마카오를 경유해 드나들고 있으며 선박의 경우 화물선은 통행이 허용되고 있다.

타이완인들의 경우 중국땅에 가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으며, 중국 정부도 이를 장려하고 있다. 샤먼시에선 타이완TV가 그대로 방영되기 때문에 주민치고 타이완 인기 연예인을 모르는 이가 없으며 가라오케 술집에선 타이완 가요가 가장 인기가 높다.

타이완인과 중국인들은 상호교류에 관한한 매우 느슨하면서도 지혜롭게 대처해왔다. 실리주의자인 중국인들은 이념보다는 현실을, 이데올로기보다는 살아가는 문제 그 자체를 중시해왔다. 그들의 양안(양안) 교류는 극적(극적)이지도 않았고, 세계 이목을 끌지도 않았다. 그저 오랜 세월을 두고 끈질기고 꾸준히 접촉방법을 개발해왔다.

55년 적대적 분단 관계에서 하루아침에 드라마처럼 협력적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 우리는 중국과 대만 양쪽 당국자들이 주민들의 아픔을 해결해주는 조용한 방식의 해결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중국과 대만 사이에는 분단은 있지만 슬픔은 없는 현실을 많이 참고해야 할 것 같다.

/샤먼(하문)=함영준특파원 yjhahm@chosun.com

중국 샤먼시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