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공관 - 탈북자들의 피난처'라는 믿음은 1시간여만에 깨졌다.

김한미(2)양 일가족 5명이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한국 영사사무소 부근 일본 총영사관으로 향한 것은 8일 오후 2시(현지시각)께.

한미양과 아버지 김광철(28)씨, 어머니 리성희(26)씨, 할머니 정경숙(53.길수군 외할아버지의 동생), 삼촌 김성국(26)씨 등은 이날 오후 2시 직전 한국 영사사무소 맞은 편 미국 총영사관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일본 영사관 앞 4차선 길가에서는 거의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선양시에서 영사관 거리로 이름난 이곳.

미국행 혹은 일본행.한국행 비자를 받으려는 중국인과 조선족 동포들, 그리고 드문드문 눈에 띄는 초록색 제복의 중국 공안원들은 저마다 바쁜 모습이었다.

한가롭게 일본 영사관 앞을 지나쳐 걸어가는 듯 하던 한미양 가족은 오후 2시가 조금 지나 갑자기 영사관 문쪽으로 뛰어들었다.

사람 한명 드나들만큼 열려있는 영사관 철문을 김광철씨와 김성국씨는 통과했지만 유아와 임산부 등 여자 3명은 깜짝 놀라 이들을 붙잡고 늘어진 공안원들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여인 2명이 외마디 비명을 토해내며 일본 영사관 철문을 붙잡고 땅바닥에 누워있는 동안 놀라서 뛰어나온 일본 영사관 직원들이 문 안쪽 1m쯤 되는 곳에 서있었지만 이들은 가만히 바라볼 뿐 공안원들을 제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비자를 받기 위해 영사관 맞은 편에서 기다리던 중국인 수십여명이 갑자기 벌어진 일에 놀라 영사관 정문쪽으로 몰려들 때까지도 리성희.정경숙씨는 영사관 철문을 붙들고 버티고 있었다.

어느새 증원된 공안원들이 이들을 철문에서 떼어놓는데 걸린 시간은 3-4분 정도.

엄마 등에 업혀있던 한미양은 엄마와 할머니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멍하니 있었다.

비슷한 시각 송용범.정범철씨는 한국 영사관이 들어있는 건물 앞에 있다 미국 영사관쪽으로 길을 건너 갔다. 공안원이 별로 없는 옆 담을 택한 이들은 들고 있던 손가방을 일부러 떨어트리고 이것을 줍는 체하다 순식간에 담을 뛰어넘었다.

공안원들이 순간 벌어진 일에 놀라 뛰어왔을 때에는 미국 영사관 담 옆길에 손가방만 남아있었다.

한편 여인 2명과 어린이가 일본 영사관 옆 공안 초소로 거칠게 끌려간 뒤 영사관 안에 무사히 들어가 안도하던 한미양 아빠와 삼촌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일본 영사관 직원들과 한동안 무언가 열심히 상의하던 중국 공안원 2-3명이 영사관 안으로 뛰어들어간 것.

잠시후 두 남자도 공안원들에게 붙들려 나왔다. 어이없어 하는 두 사람이 영사관 문을 붙들고 버티자 공안원들은 이들을 마구 때리며 나머지 여자가족 3명이 붙들려 있는 정문 초소로 데리고 들어갔다.

영사관 주변에 있던 중국인들이 급변하는 상황 전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일본 영사관 직원들과 중국 공안원들의 협의가 한동안 계속된 가운데 중국 공안 밴차량이 초소 앞으로 다가왔다.

차량 문쪽을 초소 쪽으로 대기 위해 밴차량이 U턴을 하는 동안 상황 전개는 명확해졌다. 나중에 중국 베이징(北京)의 일본대사관은 중국측 인민무장경찰이 일본측 동의 없이 영내로 진입한 것에 대해 중국 외교부에 항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잠시후 오후 3시5분께 절망스런 표정의 탈북 가족 5명이 초소 밖으로 끌려나왔다. 남자들은 비교적 무표정하게 보였으나 한미양 할머니와 엄마는 저항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다시 영사관 앞으로 현지인들이 몰려든 가운데 밴차량에는 통곡하는 한미양 엄마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한미양 아빠, 삼촌, 할머니 그리고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모르고 어머니 품에 안겨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한미양이 함께 실렸다.

자유를 찾아 들어간 일본 영사관이 이들을 매정하게 거절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시간 남짓.

중국말을 사용하는 중년의 여성이 도로 한쪽에서 중국 공안에게 무언가 거칠게 항의했다.

중국 공안원들이 증원됐을 뿐 비자 발급을 기다리는 중국인들과 길을 지나는 차량들, 서럽게 퍼런 하늘은 1시간 전 상태로 돌아갔다./서울 선양=연합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