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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 남북한의 또 다른 비대칭 전력, 말(言)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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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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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독일 수도사 그레고르 라이시가 당시 학문을 알레고리로 형상화한 그림 중 ‘수사학의 여인’이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서 말의 학문인 수사학은 입에 칼과 꽃을 동시에 물고 있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말은 꽃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전쟁의 무기처럼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긴 그림이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십계명이 우연이 아니다. 거짓말은 사람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위험물이기 때문이다.

말의 힘에 일찍 눈뜬 서양 사람들은 말을 잘 쓰면 집을 따듯하게 덥히지만 잘못 다루면 집을 태우는, 불[火] 같은 존재로 인식했다. 그런 위험물을 제법 잘 다룬 서양인들은 수사학을 지렛대로 철학이라는 학문을 일구었고, 말을 통해 민주주의를 꽃피웠으며, 논쟁의 규칙을 세워 갈등 해결의 도구로 삼았다.

이에 비해 ‘숭문어눌(崇文語訥)’의 전통이 있는 동양에서는 예부터 말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으나, 북한만은 예외인 것 같다. 각종 구호로 도배된 북한의 거리는 레토릭 낙원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게다가 사상 교육으로 무장된 사람들은 입이 풀려있어 대적하기 부담스럽다. 나는 달변의 태영호 의원을 포함해 TV에 출연하는 북한 이탈 주민들의 거침없는 말발을 접할 때마다, 만약에 남과 북이 미사일 대포가 아닌 말로만 붙는다면 북이 이길 것이라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불행히도 그런 상상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혁명의 수단’으로서의 말의 가공할 위력을 먼저 감지한 북한이 전열을 가다듬고 대대적인 단속과 함께 ‘억세게 싸울 기세’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올해 초 최고인민회의에서 ‘평양문화어보호법’을 만들어 ‘괴뢰말’인 한국식 말투를 쓰면 6년 이상 징역, 가르치거나 인쇄물을 제작 유포하면 최고 사형까지 처벌할 수 있게 했다. 남측 영상물을 유포한 사람을 사형에 처한 것이 3년 전이다. 새 법은 여기에 게임 ID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일러스트=박상훈
 
/일러스트=박상훈

그들의 표현대로 ‘근본을 알 수 없는 잡탕 말이자 쓰레기 말’로부터 자신들의 언어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문제는 평양발 혁명의 언어들을 우리나라로 계속 흘려보내 사회를 교란시킨다는 점이다. 핼러윈 참사 때 ‘퇴진이 추모다’ 같은 투쟁 구호까지 직접 지어서 내려보내는가 하면, 보수 성향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댓글이나 만평을 올려 법적 문제를 일으키는 역공작을 펼치라는 지시도 내렸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윤석열 후보 대망론에 적극 대응하라”고 지시하고, “댓글 팀들이 태극기 부대를 사칭해 윤석열의 (당시) 야권 후보 대망설은 보수 난립을 노린 집권 여당(민주당)의 술책이라는 괴담을 널리 유포시키라”고 했다고 한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여러 차례 정권 퇴진 운동과 반미 투쟁을 지시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북한에서 내려온 댓글과 시위 구호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동원되고 놀아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한없이 찜찜하다.

미국과 대척점에 있는 러시아가 어떻게 미국 사회 여론에 침투하는가 하는 탐사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이들은 아프리카 국가인 나이지리아와 가나 등에 위장 회사를 차려놓고 댓글 공작을 하는데, 주로 미국 내 인종차별 이슈를 부추기고 사회 갈등을 조장한다. 이런 댓글 조작 회사의 운영자가 고액의 수입을 올리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사이트 깊숙이 러시아어가 발견되는 점을 들어 러시아의 개입이 의심된다는 보도였다.

다른 대륙(아프리카)에 회사까지 차려 모국어도 아닌 언어(영어)로 미국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러시아의 힘겨운 노력에 비하면, 북한의 대한민국 개입은 땅 짚고 헤엄치기다. 우선 생김새가 같으니 섞여도 모르고, 같은 언어를 쓰니 사투리 배우듯 조금만 신경 쓰면 바로 공론장에서 ‘활약’이 가능하다. 왕래가 자유로운 조선족들을 잠재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자생적인 북한 추종 세력들이 충실하게 지령을 수행하니 이보다 쉬운 장사가 없다. 얼마 전 간첩단 혐의로 기소된 경남 창원의 ‘자주통일 민중전위’가 한 일을 보면 북한의 지령보다 그걸 떠받드는 남쪽 사람들이 더 문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북한 언어를 조기에 학습한 운동권 세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그 사상과 언어 습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고, 국회에서는 야당 정치인이 북한의 낯선 언어인 ‘견결’ ‘총화’ 같은 단어를 서슴없이 발언한다. 민노총 홈페이지에는 북한조선직업총동맹이 보낸 글이 버젓이 올라있는데도 우리 방송통신심의원회는 ‘표현의 자유 보호’ ‘다양한 사상과 주장을 인정할 필요성’ 등을 근거로 손대지 못하고(않고) 있다.

그뿐인가. 입만 열면 거짓말인 정치인들, 그에 대한 무뇌아적 추종 글들, 여야가 따로 없(어야 하)는 외교 문제에도 남의 나라 헐뜯듯 난도질하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헷갈리는 논객과 정객들, 어떤 괴담과 가짜 뉴스가 올라와도 30% 정도는 진짜로 받아들이는 혼탁한 공론장. 그 속으로 자유와 독이 적당히 섞인 칵테일 같은 북한발 메시지가 해커들의 활약으로 스며들어오고 있다. 사상의 자유 시장 이론에 따르면 거짓 불량 정보는 시장에서 걸러져야 하는데, 우리의 공론장이 과연 그 정도로 자정 능력과 복원력이 있는가? 북에서는 남한 말을 쓰면 사형인데, 남에서는 북한 말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유포되고 보호되며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고 사회를 움직인다. 심각하고 위험한 전력의 비대칭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정신없고 대책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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