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뉴스1
 
국가정보원/뉴스1

국내 진보 정당의 간부 등이 2017년 캄보디아에서 북한 대남 공작원을 만나 “제주도에 ‘ㅎㄱㅎ’이라는 지하 조직을 설립하라”는 지령을 받은 뒤 반(反)정부 및 이적 활동을 해온 혐의로 방첩 당국의 수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8일 확인됐다. 국가정보원과 경찰 등은 5년 이상 이 사건을 추적했으며 작년 말 두 차례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첫 간첩단 혐의 사건이다.

본지가 입수한 압수수색 영장 등에 따르면, 진보 정당 간부 A씨는 2017년 7월 29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노동당 대남 공작 부서인 문화교류국(옛 225국) 소속 공작원을 접선했다. A씨는 캄보디아 은신처에서 사흘간 북 공작원으로부터 제주 지하 조직 ‘ㅎㄱㅎ’ 설립과 운영 방안, 암호 통신법 등을 교육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이후 제주 노동계 간부 B씨와 농민운동을 하던 C씨 등 2명을 포섭해 실제 ‘ㅎㄱㅎ’을 조직했다. ‘ㅎㄱㅎ’의 뜻은 수사 중이라고 한다. 이들은 작년 11월까지 북한으로부터 “민노총 산하 제주 4·3통일위원회 장악” “반미 투쟁 확대” “윤석열 규탄 배격” “한미 군사훈련 중단” “미 첨단 무기 도입 반대” “반(反)보수 투쟁” 등 구체적 지령을 받았다. 일부 지령은 실제 이행했다고 북한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첩 당국은 영장에서 “압수수색 5일 전까지도 이들은 북한 문화교류국과 암호 프로그램과 클라우드를 이용해 통신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당국은 ‘ㅎㄱㅎ’이 제주도뿐 아니라 국내 다른 지역에도 결성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정치권에 따르면, A씨는 제주도 출신으로 진보 정당의 지역 위원장을 지내며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A씨는 혐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진보 단체는 “정부가 공안 몰이를 하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방첩 당국 측은 “북한 공작 기구와 내통한 것은 분명한 범죄 행위”라며 “A씨의 간첩 혐의와 관련한 증거가 구체적이기 때문에 법원도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송윤혜
 
그래픽=송윤혜

‘ㅎㄱㅎ’ 조직원들은 2017년 이후 5년 3개월간 북한 대남 공작기구인 문화교류국의 지령문을 수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직책인 A씨는 북 지령에 따라 지난 5년간 제주 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반정부, 반보수, 반미 시위를 벌인 혐의를 받고 있다.

압수수색 영장을 보면 ‘ㅎㄱㅎ’은 2021년 10월 19일 북한으로부터 ‘진보당 ㅈㅈ도당과 민주노총 ㅈㅈ본부 4·3 통일위원회, 전농 ㅈㅈ도연맹, ㅈㅈ지역 반전평화옹호단체들을 발동해 합동 군사 연습 중단, 한·미·일 군사 동맹 해체, 미국산 첨단 무기 도입 반대 등 구호를 들고 항의 집회, 항의 방문, 서명 운동 같은 대중 투쟁을 연속 전개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ㅈㅈ’는 제주를 의미한다.

‘ㅎㄱㅎ’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 직후인 지난해 3월 29일 ‘한미 합동 군사 연습을 반대하는 대중 투쟁을 집중 전개해 취임을 앞둔 윤석열은 물론 미국에도 강력한 압박 공세를 들이대야 한다’는 내용의 지령을 받았다. 윤 대통령 취임에 앞서 반미 시위를 벌이라는 것이다. 같은 날 ‘민주노총 4·3통일위원회, 학교비정규직노조 제주지부, 건설노조 제주지부를 비롯한 노조들과 진보운동 단체들을 발동해 진보 정당 후보들을 밀어주기 위한 지지 운동을 벌이라’는 취지의 지령문도 받았다. 실제 민노총 제주본부는 지난해 6·1 지방선거를 3주쯤 앞둔 5월 17일 제주도청 앞에서 진보 진영 인사를 지지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방첩 당국은 ‘ㅎㄱㅎ’ 조직원이 민노총 제주본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윤 대통령 취임 한 달 전인 지난해 4월 19일에는 ‘미군기지 철폐, 북남선언 이행을 내걸고 지역에서 다양한 투쟁을 전개해 윤석열놈을 규탄 배격하는 사회적 기운이 고조되게 하는 데 힘을 넣어야 한다’는 지령문을 발송했다. 이어 6월 9일 자 지령문에는 특정 조직원 이름을 거론하며 그의 조직을 중심으로 ‘노조를 결속시켜 반미 투쟁에서 선봉적 역할을 해나가라’고 지시했다. 작년 10월 31일 자 지령문에선 ‘민주노총 4·3통일위원회, 민주일반노조연맹 등 진보운동 단체들을 내세워 반보수 단체들을 재정비하고 확대 개편하는 방법으로 촛불 단체들을 내오고(조직하고), 여기에 지역 중도층을 망라시켜 투쟁 동력을 확보하라’고도 했다.

북한이 노동 조직화를 강조한 배경과 관련, 압수수색 영장은 “(북한이) 단결력, 전투력이 강한 노동자들을 앞에 내세워야 다른 모든 계급의 선두에서 대중을 견인해 나갈 수 있다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방첩 당국은 A씨가 북한 지령에 따라 조직원들과 함께 지역 진보 정당과 노동, 농민 운동 단체에 대한 장악을 시도한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실제 이들이 활동한 정당과 노동 단체 등은 작년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RIMPAC·림팩) 훈련 반대, 제주해군기지 폐쇄 기자회견 등에 개입했다. 또 북한은 진보 정당을 “지하조직 ‘ㅎㄱㅎ’의 합법적 활동 공간으로 이용하며 선거 때마다 ‘반보수 투쟁’을 진행하라”고도 지시했다.

‘ㅎㄱㅎ’은 친북 활동을 벌인 혐의도 받고 있다. 지난 2019년 2월 제주도에서 ‘북한 영화 상영식’을 열어 ‘우리집 이야기’를 상영했는데 주인공이 일기장에 ‘우리의 아버지 김정은 원수님, 우리 집은 당의 품’이라고 적는 장면 등이 나온다. 보안 부서 관계자는 “북한 지령문에는 주체 사상, 선군 정치, 김정은 위대성 선전 사업 추진 등도 주요 지시 사항으로 들어 있다”고 했다.

A씨를 포섭한 북한 문화교류국은 노동당 직속 대남 공작 조직이다. 북한 정권 수립 초기부터 대외연락부, 사회문화부, 225국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간첩 남파 등의 임무를 수행해 왔다. 1992년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1994년 구국전위, 1999년 민족민주혁명당, 2006년 일심회, 2011년 왕재산 등 각종 간첩 사건에 개입했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