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이 9일 산둥성 칭다오(靑島)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장관급 인사의 방중은 처음이다. 양측은 최근 공방 중인 주한 미군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문제,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칩4′에 한국이 참여하는 문제,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의 방문과 중국의 맞불 훈련으로 격화한 대만·남중국해 문제 등을 폭넓게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왕 부장은 모두발언에서 “윈윈(win-win)을 견지해 안정적이고 원활한 공급망과 산업망을 수호해야 한다”고 했다. 칩4와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등 중국 견제 차원에서 이뤄지는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 시도와 한국의 동참에 불편한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박 장관은 “지금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전례 없이 위협받고 있다”며 “북한이 도발 대신 대화를 선택하도록 중국이 건설적 역할을 해달라”고 했다.

왕 부장은 또 “평등과 존중을 견지해 서로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대만·남중국해 문제가 자신들의 ‘내정’임을 재차 강조한 것으로, 최근 박 장관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대만·남중국해 문제를 여러 차례 거론한 것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됐다.

왕 부장은 이어 “중한 양측은 독립자주를 견지하고 외부의 장애와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며 “서로의 중대 관심사를 배려해야 한다”고 했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에 끌려다니지 말라는 얘기”라며 “특히 사드가 자신들의 안보이익을 해친다는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라고 했다. 왕 부장은 ‘사드 문제의 타당한 해결’을 재차 언급하며 한국 측에 ‘사드 3불 유지’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장관은 중국이 ‘사드 3불’을 고집할 게 아니라 북한의 비핵화에 힘써 달라고 주문하면서 “사드는 한국의 안보 주권과 직결된 문제로, 중국은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중국 측 주장을 반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드 3불’이란 ‘사드 추가 배치를 하지 않고, 한·미·일 군사 동맹과 미국의 미사일 방어에 불참한다’는 입장으로, 문재인 정부 초반인 2017년 10월 강경화 당시 외교장관이 국회에서 밝혔다. 중국 정부는 이를 문재인 정부의 ‘약속’으로 간주해 줄곧 이행을 요구했고, 최근 윤석열 정부를 향해서도 ‘계승’을 공개 요구했다.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도 이날 사설에서 “사드 문제는 한중 관계가 직면한 커다란 근심”이라며 “한국은 친구(미국)가 건네는 칼(사드)을 받지 말라”고 했다.

이날 회담은 한국 정부가 ‘칩4′ 예비회의에 참여하기로 방침을 정한 뒤 처음으로 한중 고위급 인사가 대면하는 자리란 점에서 외교가의 관심을 끌었다. 중국은 칩4가 미국의 중국 견제용이고, 대만이 참여한다는 점을 들어 반발해 왔다. 중국 측은 칩4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이던 한국 정부가 최근 ‘예비회의 참가’로 돌아선 데 대해 ‘설명’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장관은 “칩4는 특정 국가를 배제하기 위한 게 아니다”라며 중국 측의 우려 불식에 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모두발언에서도 “그간 밀접한 경제 관계를 발전시켜온 양국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서비스 투자 협상 타결, 공급망의 안정적 관리 등을 통해서 새로운 도전들을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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