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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똥간나새끼”... 탈북 국군포로의 한맺힌 죽음
조윤정 기자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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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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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허재석씨의 유해가 안장된 국립대전현충원. photo 뉴시스
 
고 허재석씨의 유해가 안장된 국립대전현충원. photo 뉴시스

1954년 북한 함경북도 경흥군의 아오지 탄광. 두만강만 건너면 중국 땅인 이곳은 1월 평균 기온이 -10도인 한반도의 최북단 지역이다. 국군포로 고 허재석씨는 이곳에서 겪은 수용 생활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그야말로 탄광에서의 생활은 지옥이었다. 제일 낮은 막장에서는 기온이 영상 40도까지 올라가 숨쉬기도 힘겹고 땀은 비 오듯 했다. 한참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눈만 반들반들 빛났다.… 지압이 제일 센 밑바닥에서 탄을 캐다 보니 발파도 할 수 없고 레일을 놓지 못해 밀차도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이지만, 작업 총화 때 실적이 없으면 심한 비판을 받았다. 하루 실적은 8톤을 해야 했다. 8시간 내내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질통에 담아서 져 날라야 겨우 작업량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하막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다 밖에 나오게 되면 순간적으로 모든 게 얼어붙었다. 발싸개도 없이 신발을 신고 다니다 보니 신발을 벗을 수가 없었다. 그걸 힘으로 억지로 벗게 되면 살 껍질이 벌겋게 묻어났고 나중에는 피가 나왔다.’

이런 글을 남긴 허씨는 향년 89세로 지난 11월 2일 세상을 떠났다. 원인은 폐암. 아오지, 신창, 무산 등 북한 각지 탄광에서 광부로 동원됐던 대부분의 국군포로들에게는 호흡기 질환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상흔이다. 허씨 역시 이들 중 하나. ‘괴뢰군 포로’로 북한에서 50년간 최하위 빈민계층으로 살다가 지난 2000년 간신히 탈북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발을 벗으면 살 껍질이 묻어났다”

허씨는 경상남도 진양군(현 진주시)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졸업 후 정미소에서 일하다가, 갓 스무 살이 되던 1952년 징집돼 강원도 금화군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그러다 1953년 7월 4일, 정전협상을 3주 앞두고 최전방 봉수리에서 중공군에게 붙잡혀 북한으로 넘겨졌다가 일흔을 넘긴 나이에 다시 고향 땅을 밟은 것이다. 2008년에 펴낸 국군포로 수기 ‘내 이름은 똥간나새끼였다’(원북스)에는 허씨가 북한에서 겪었던 고초와 부조리가 상세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북한에 가족이 있는 국군포로가 한국에서 실명을 내걸고 증언한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와 가족들은 계급사회 가장 밑바닥 최빈민계층으로, 각종 차별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감시받는 신세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강제 억류된 포로는 단 한 명도 없다’는 북한 측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북한에 남은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1969년 12월 11일 벌어진 KAL기 납북 피해자 가족이자 허씨의 책 출판을 도운 황인철씨는 “북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조용히 해야 가족이 산다는 생각을 항상 할 수밖에 없다”며 “국군포로 어르신들도 목소리를 내면 가족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말했다.

고 허재석씨의 경우 이런 악몽은 현실이 됐다. 남한에서 수기가 발간되고 1~2년 후인 2010년경, 북에 남겨두고 온 아들이 고문당하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확한 사실 확인은 어려웠지만, 주변 사람들은 허씨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허재석씨 책의 추천사를 쓴 피랍탈북인권연대 도희윤 대표는 “아들이 고문받아 사망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며 “어르신이 수기를 쓰실 때도 이런 문제 때문에 대단히 큰 각오를 하고 결단을 내리셨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수기 펴낸 후 북 아들 사망 소식

지난 11월 3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고 허재석씨의 빈소. photo 사단법인 물망초재단 페이스북
 
지난 11월 3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고 허재석씨의 빈소. photo 사단법인 물망초재단 페이스북

그럼에도 허씨는 책을 쓰겠다는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고 한다. 2000년에 한국으로 와 전라남도 구례군 지리산 자락의 작은 마을에 정착해 살던 허씨는 탈북 직후부터 꾸준히 원고를 써왔다. 당시 출판사 ‘원북스’를 운영하고 있던 황인철씨는 납북자 가족, 국군포로 관련 모임에 나갔다가 한 국군포로 어르신이 책을 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몇 다리 건너 허씨와 접촉해 원고를 받았고, 최소한의 편집으로 문체를 살린 체험수기록을 단행본으로 펴냈다. 책이 나온 후 출판기념회를 열었던 도 대표는 “어르신의 출판 의지가 굉장히 강하셨다”며 “우리 같은 시민단체는 가족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본인의 의지와 판단이 전제되지 않으면 먼저 출판하자고 권유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부모로서 자식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자책감에 시달릴 줄 알면서도 허씨가 목소리를 낸 이유는 책에 명백히 적혀 있다. 북한 땅에 강제 억류돼 고통받았던 국군포로의 삶을 증명하고, 한 명이라도 더 한국 땅으로 데려오기 위해서다.

‘내 나이 73세,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왜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지 북한은 알아야 한다. 북한 정권은 나의 발과 손에 족쇄를 채우고 50여년의 긴긴 세월을 보내면서 국군포로들의 피 한 방울까지 모두 짜내어 안주하여 모두 먹어치웠다. 그뿐인가? 이중삼중 감시를 하면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신경을 쓰면서 약간의 기미만 보여도 불러서 독방, 영창에 가두어 놓고 모진 고문과 억압을 가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몸이 되는 우리 포로들은, 한을 품고 죽어간 동료의 값비싼 대가를 북한이 치르지 않겠다면 나 개인으로라도 그 값을 받아내고야 말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죽어가는 그들의 숨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다.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국군포로들을 어떤 악조건에 있다 해도 꼭 한국으로 모시고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황씨는 “어르신이 술도 좋아하시고 본인의 생각도 뚜렷하시고 아주 호인이셨다”며 “나와 내 가족이 희생하더라도 전우의 고통, 정부가 해야 할 일 등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수기를 펴내기로 용기를 내신 것 같다”고 했다.

허씨의 희생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을까. 5만~7만명으로 추정되는 강제 억류 국군포로 중 한국으로 돌아온 노병은 지금까지 모두 80명이다. 이 중 정식으로 ‘송환’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80명 모두 북한을 ‘탈출’해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자력으로 사지를 지나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고령의 피해자들이 건너오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2010년을 마지막으로 간절한 발길도 끊어졌다.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미송환 국군포로는 100여명으로 추정된다.

‘송환’은 제로, 아직 100여명 남아

1994년 ‘귀환 포로 1호’인 조창호 소위가 귀환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국군포로는 잊혔던 존재였다. 6·25전쟁에서 실종되었거나 포로로 추정되는 국군 8만2318명 중 전사자 등을 제외하면 강제 억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로는 5만~7만여명에 이른다. 이 중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상 결과 교환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하다. 반면 북한으로 송환된 인민군 포로는 총 7만6119명이다. 적국에서 포로 신분으로 전락한 수만 명의 군인을 잊고 지낸 지 40여년 만에 조창호 중위가 처음으로 탈북에 성공해 한국 땅을 밟았다. 조 중위의 증언으로 국군포로의 규모, 실태 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한 명 한 명 이어지는 전우들의 증언을 통해 알음알음 핏줄의 생사를 확인한 국군포로 후손들이 어르신들의 탈북 경로를 마련했다. 1997년 탈북한 양순용씨가 허재석씨의 존재를 동생 허태석씨에게 알려줘 허씨도 동생의 도움으로 탈북할 수 있었다. 귀환한 허재석씨는 “함경북도 지역 탄광에만 500여명의 국군포로가 있었다”고 증언했고, 이들의 명단과 주소를 힘닿는 데까지 가족들에게 알려주며 2005년까지 이어진 ‘귀환 붐’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15년도 더 된 일이다.

‘내 이름은 똥간나새끼였다’ photo 원북스
‘내 이름은 똥간나새끼였다’ photo 원북스

포로 송환 손 놓은 국방부

포로 송환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북한이 정전협정 체결 이래 한결같이 국군포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한은 포로로 잡힌 군인들이 자발적으로 북한에 남길 원했다는 논리를 펼쳐왔다. 이 때문에 국방부가 미송환 국군포로의 귀환을 위해 공식적으로 펼친 노력은 없었다. ‘2020 국방백서’의 ‘국군포로 문제 해결’ 항목을 보면, ‘정부는 제3국으로 탈북한 국군포로와 그 가족들이 안전하게 국내로 송환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귀환 포로가 조기에 안정적으로 국내에 정착해 노후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라고만 되어 있다. 포로가 혼자 힘으로 북한 땅을 빠져나온 다음에는 돕겠다는 것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국군포로 송환 문제와 가족들의 안전에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국방백서에 기재된 내용 말고는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다”고 답했다. 미송환 포로와 가족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상 정부가 손을 놓은 상황이다.

공식적인 포로 송환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들의 안전을 담보하고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국 정부의 의지뿐이다. 정식 송환은 아니더라도 조용히 제3세계로 나오는 것을 내버려둬 달라고 북한과 협상하거나, 포로 문제를 지속적으로 언급하면서 북한에 압박을 가하는 방법 등이 있다. 도희윤 대표는 “국군포로 명단과 현황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북한에는 큰 압박이 된다”며 “‘우리가 다 지켜보고 있는데, 이들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한국 정부 입장에서 지탄하는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으니 잘 좀 하라’는 식으로 이들을 보호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지금 정부에서는 ‘북의 가족들 신변이 노출될 수 있으니 명단을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들어 포로 문제 언급 자체를 꺼리고 있다. 심지어 올해 연말 UN(유엔)총회에서 채택될 북한인권결의안 초안에 사상 최초로 국군포로의 인권 탄압을 우려하는 내용이 들어가는데, 한국 정부는 이 결의안 공동 제안국에서 빠졌다. 2019년 이후 3년째 계속 북한인권결의안 제안국에 들어가질 않고 있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몇 년째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종전선언’이 국군포로 송환에 도움이 될까. 이 질문에 전문가들은 정색하고 ‘도움이 안 된다’고 답한다. 정수한 울산대 초빙교수이자 사단법인 물망초재단의 국군포로송환위원장은 “종전선언은 전쟁을 끝낸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며 “겉으로 드러나는 평화 체제에만 중점을 두는 것이지 국군포로, 이산가족, 납북자 등 정말 현실에서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들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국군포로와 가족의 안전 문제는 정부의 의지가 있어야 해결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특히 북에 남은 국군포로의 가족들은 한국 정부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서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현재 북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 100여명의 가족은 200~300명 규모로 추정된다. 출신성분에 따른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이들은 ‘괴뢰군’과 연좌제로 얽혀 사회 최빈민층으로 살아야 한다. 국군포로의 자식은 교육도 못 받을 뿐 아니라, 노동당에 입당한다 해도 계속 적대계급으로 분류돼 출세의 사다리도 타지 못한다. 국군포로와 가족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멸시, 빈곤은 북한에서 당연시된다. 허씨가 탈북을 마음먹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최하위층으로 겪는 설움 탓이었다고 수기에 쓰여 있다. 일흔이 다 돼가는 나이에 아오지 송진산에서 경비로 일하던 허씨는 인민군, 작업반장, 당비서 등이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조리한 문제들을 ‘국군포로 출신’인 본인에게 미루며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폭발하고 말았다고 적었다.

‘국군포로는 없다’는 북한

허씨의 책은 ‘강제 억류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북한의 논리를 모두 반박하는 귀중한 자료다. 북한이 국군포로의 존재를 부인하는 근거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그들이 스스로 북한에 남았다는 논리이고 두 번째는 포로들에게도 주민 신분을 부여해 민간인으로 살게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 정부는 1956년 ‘내각결정 143호’를 내려 주민등록증 개념인 ‘공민증’을 포로들에게 부여했다. 공민증을 받은 포로들은 법적으로는 민간인 신분이 돼 결혼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공민증은 선전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노동당은 국군포로와 가족들을 계속 감시하고 수시로 보위부에 불러 심문했다. 탄광에서의 일도 계속됐다. 허씨 역시 수기에서 “공민증은 거짓선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술회하며 “450~500명 포로 가운데 30~40명만 (사회에 내보낸다고) 뽑았는데, 이들은 양팔이 없거나 부상 때문에 얼마 견디지 못하고 죽을 사람들,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들만 추려서 어디론가 보내고 남은 사람들은 갱도로 다시 내몰았다”라고 썼다.

허씨의 결단과 각오가 무색하게 수기는 몇 부 팔리지도 못하고 절판됐다. 지금은 중고서적이나 국립중앙도서관의 북한자료센터에서만 구할 수 있다. 허씨는 각오한 것에 비해서 성과가 좋지 않아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고 한다. 처자식의 안전과 맞바꾸면서까지 수기를 출판하기로 결심했는데, 가족에 느끼는 부채감이 더욱더 크게 와 닿았을 것이다. 정착지원금 등을 받아 경제적으로는 부족하지 않게 살았음에도 허씨는 “북녘에 두고 온 처자식을 생각하면 한순간에 북극에 온 것처럼 온몸이 싸늘해지고 맥이 쭉 빠진다”고 적었다. 지난 2018년 12월 중순 허씨를 만나 인터뷰했던 사단법인 물망초재단의 이재준 국군포로송환위원회 팀장도 허씨의 외로움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꼈다고 전했다. 이 팀장은 “우리가 10시30분에 도착한다고 말씀드렸는데 10시10분부터 마을 어귀에 나와서 기다리고 계시더라”며 “손자뻘이라고 무척 반겨주시면서 아침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셨다”라고 했다. 도희윤 대표는 “어르신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며 “그런 아픔을 잊지 않고 지금도 노예의 삶을 사는 국군포로와 가족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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