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소련 고르바초프와 회담 -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2월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1990년 소련 고르바초프와 회담 -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2월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노태우 정부는 국민에게 초라한 평가를 받아왔다. 국회입법조사처의 2015년 보고서에서 노태우 정부는 일반인 평가에서 역대 정권 중 최하점을 받았다. 하지만 시대를 몇 걸음 앞서간 정책들이 뒤늦게 조명받으며 그 진가를 재평가받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그의 최대 업적으로 꼽는 건 북방외교다. 1980년대 후반 소련 붕괴와 동구 공산권 해체로 국제 정세가 격변하던 시기에 노태우 대통령은 공산권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는 북방외교를 구사했다. 1988년 ‘7·7 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이 신호탄이었다. 1989년 2월 헝가리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소련·중국 등과 공격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국제무대 변방에 머물던 대한민국 외교의 지평을 전 세계로 확장했다. 4년 남짓한 북방외교 기간 45국과 수교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북방외교로 체급을 키운 대한민국의 위상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1991년 9월)으로 이어졌다.

능동적 북방외교는 탈냉전 시기 체제 위기를 절감하던 북한을 협상장으로 나오게 했다. 당시 발표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년 9월)은 역대 정부가 모두 계승 의사를 밝힌 대한민국 통일정책의 기본이 됐고, 1991년 12월 북한과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좌우 모두 남북관계의 교범으로 인정하는 문건이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북방외교는 오늘날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경제적·국제정치적·문화적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발판”이라며 “특히 군부와 보수 강경층의 반대,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이란 어려움에도 밀어붙였다는 건 높이 평가할 대목”이라고 했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탈냉전이란 시대적 대전환의 흐름을 잘 읽고 선도적으로 북방외교를 펼친 것은 탁월한 통찰”이라며 “주변 정세를 잘 활용해 북한을 대화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도 우리 외교의 모범적인 전례”라고 했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6일 브리핑에서 “노태우 선생은 중국의 좋은 친구로 한중 수교와 양국 관계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며 “중국 측은 노태우 선생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가족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고 했다.

1기 신도시 건설로 대표되는 노태우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집값 안정의 모범 답안으로 거론된다. 3저 호황(저달러·저금리·저유가)으로 집값이 폭등하는 등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자 노 대통령은 1989년 분당·일산 등 5개 신도시를 건설, 전체 주택 물량의 약 20%인 200만가구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를 통해 아파트 공급이 쏟아지며 꺾일 줄 모르던 부동산 시장이 빠르게 하향 안정화됐고 이 추세는 10년 가까이 이어졌다.

김경민 서울대 교수는 “분당에 거주뿐 아니라 직장 기능을 넣어 판교의 성공으로 이어간 것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며 “1기 신도시처럼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성장한 신도시는 외국에도 거의 없다는 점에서 세계적 모범 사례”라고 했다. 토지공개념을 도입해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 개발이익환수제 등을 도입한 것도 부동산 시장 안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단기간에 부동산을 대량 공급한 탓에 자재 파동, 부실 시공, 집값 폭등, 물가 상승 등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때 시작된 경부고속철도(KTX), 인천국제공항 건설 등 대형 SOC(사회간접자본) 프로젝트들은 “무모한 과잉 투자”란 비판을 받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통·물류의 수준을 도약시킨 대형 국책 사업들로 인정받고 있다. 강원택 교수는 “KTX, 서해안고속도로, 인천국제공항 등 당시 시작된 대규모 토목 프로젝트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인프라 확충에 크게 기여한 게 사실”이라고 했다.

국민연금 도입과 건강보험 전 국민 확대도 당시의 성과로 꼽힌다. 김성수 한양대 교수는 “노태우 정부에서 국민연금, 최저임금, 의료보험 제도가 확대되고 제도화된 것은 큰 성과”라며 “경제개혁 분야에서 의미 있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범죄와의 전쟁’은 영화로도 제작돼 널리 알려진 노태우 정부의 치안 정책이다. 1990년 10월 13일 발표한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선언’ 이후 본격화한 검경의 전방위 범죄 소탕 작전으로 사회적 병폐였던 조직폭력배가 상당 부분 근절되는 등 2년 만에 5대 강력범죄 발생률이 5.9% 감소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서민들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치안 안전성을 제공하게 된 계기”라며 “민주화는 물론 선진국으로의 번영의 발판이 됐다”고 했다.

1988년 1월 1일 노태우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 허용한다”고 발표하는 등 탈권위주의 행보로도 주목받았다. 13대 총선으로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되자 야당 대표(총재)들과 수시로 영수회담을 가졌다. 강원택 교수는 “(고인은) 야당 대표를 가장 자주 만난 대통령”이라며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를 야당에 나눠주는 관행도 이때 생겼다”고 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도 고문 수사, 민간인 사찰 등 군사정권의 잔재를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과 이철규 의문사 사건, 오홍근 테러 사건 등이 이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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