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남북통신연락선을 복원한 4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관계자가 개시통화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북한이 남북통신연락선을 복원한 4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관계자가 개시통화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55일간 단절됐던 남북 간 통신선이 4일 복원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근 최고인민회의 시정 연설을 통해 복원 의사를 밝힌 지 닷새 만이다. 북한은 이날 “남조선 당국은 북남 통신 연락선의 재가동 의미를 깊이 새기라”며 훈계조로 ‘선결 과제 해결’을 요구했다. 작년 6월과 지난 8월 잇따라 통신선을 일방적으로 차단해 남북 관계를 경색시킨 데 대한 사과·유감은 없었다.

통상적으로 통신선은 주말과 쌍방 공휴일엔 운영하지 않는다. 하지만 북한은 한국의 휴일인 이날을 재가동 시점으로 택했고, 통일부는 직원들을 아침 일찍부터 대기시켰다. 전문가들은 “굳이 우리 휴일에 통신선을 복원한 것은 ‘향후 북남 관계는 공화국 시간표에 따른다’는 통보인 셈”이라고 했다. 오전 9시 개시 통화에 북이 응하자 통일부는 “한반도 정세 안정과 남북 관계 복원을 위한 토대가 마련됐다”며 환영했다. 일방적인 통신선 차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해수부 공무원 사살 등으로 남북 관계를 망가뜨린 북에 대한 입장 표명은 없었다.

이날 장면은 현재 남북 관계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는 통신선 복원을 시작으로 정상 통화, 인도적 지원, 이산가족 상봉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정상회담과 종전 선언을 기대하고 있다. 임기 말 남북 이벤트에 집착하다 보니 할 말을 못 하고 북의 처분만 기다리는 모습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앞으로도 북의 부당한 요구에 끌려다닐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남북통신연락선이 복원된 4일 군 관계자가 남북 군 통신선 시험통화를 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남북통신연락선이 복원된 4일 군 관계자가 남북 군 통신선 시험통화를 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특히 북한은 이날 오전 관영 매체를 통해 통신선 복원을 예고하며 “남조선 당국은 통신 연락선의 재가동 의미를 깊이 새기고 선결돼야 할 중대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통신선 복원을 대남 시혜 조치로 규정하고, 이를 유지하고 싶으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해결하란 얘기다.

북한이 일방적인 통신선 차단으로 남북 관계를 파탄 낸 뒤 큰소리를 치며 대화에 복귀하는 적반하장식 태도는 역사적으로 반복된 패턴이다. 남북 간 통신선은 1971년 개통 이래 이번을 포함해 총 7차례 단절과 복원을 되풀이했다. 모두 북한이 일방적으로 끊었다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복구했다. 현 정부 들어서도 북한은 13개월간 단절됐던 통신선을 지난 7월 24일 돌연 복원했지만 8일 만에 김여정의 한밤 담화를 통해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했다. 정부가 미국과의 갈등을 불사하며 훈련을 대폭 축소했는데도 북한은 복원 2주 만에 통신선을 다시 끊었다. 이번에 북한은 이날 55일 만에 통신선을 재가동하면서 ‘선결 과제 해결’이란 청구서도 동시에 발송한 모양새다.

 

선결 과제란 김여정이 요구한 ‘이중 기준’과 ‘대북 적대 시 정책’의 철회를 뜻한다. 앞으로 한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각종 미사일을 발사해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을 넘어 한미 연합훈련 영구 중단, 미국 첨단 무기의 한반도 전개·반입 중단, 대북 제재 완화에 적극 나서란 얘기다. 김형석 전 통일부 차관은 “우리 정부를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고 곤혹스럽게 하는 요구 조건들”이라고 했다.

문제는 북의 요구 사항이 하나같이 미국과의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이다. 고려대 남성욱 교수는 “북한이 한미 동맹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며 “한미 관계가 불협화음을 넘어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미 조야에선 문재인 정부가 한미 관계 훼손도 불사하며 북한 요구를 들어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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