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극초음속 미사일’ 도발 이틀 만인 29일 남북 통신연락선 복원을 시사하며 “남북 관계가 심각한 선택의 갈림길에 있다”고 했다. ‘남북 관계 개선’ ‘종전선언’을 위한 조건들도 제시했다. 최근 3번의 미사일 도발과 김여정 담화를 앞세워 강온 양면전략을 구사하던 김정은이 직접 나서 대남·대미 관계 구상을 밝히자 여권은 일제히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는 겉으로는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며 표정관리를 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꽉 막힌 남북 관계에 물꼬를 트는 것을 넘어 임기 말 정상회담 기대감이 흘러나오고 있다. 여권에선 남북이 물밑에서 올해 11~12월, 늦어도 내년 2월 베이징 동계 올림픽 전후로 ‘깜짝 이벤트’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북의 잇단 도발에 대해 유엔 안보리가 회의를 소집하는 등 국제사회의 규탄이 잇따르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 올인 마이웨이’를 가겠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29일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북남 관계가 하루빨리 회복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일단 10월 초부터 통신연락선들을 다시 복원하라”고 말했다고 30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남북 정상은 올해 수차례 서한을 주고받으며 작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단절됐던 남북통신선을 복원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은 한미 연합훈련 등에 반발하며 2주 만에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김정은은 최근 잇단 미사일 도발을 정당화하며 “우리는 남조선을 도발할 목적도 이유도 없으며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최근 북한은 미사일 발사와 ‘조건부 대화 용의’라는 메시지 발신을 병행하다 이날 김정은이 최종 정리를 한 모양새다. 북한은 9월 11~12일 신형 장거리 순항미사일을 발사한 데 이어 15일 탄도미사일을, 28일 극초음속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런 가운데 김여정은 24일과 25일 연이틀 담화를 통해 ‘종전선언은 좋은 발상’ 등의 미끼를 던졌다.

뒤이어 김정은은 이날 연설에서 북한 적대시 정책 철회 등을 위해 우리 정부가 미국 설득에 나서라고 압박했다. 그는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제안한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간 종전선언에 대해 “미국에 추종해 국제공조만을 떠들고 있다”며 “불공정한 이중적인 태도, 적대시 관점과 정책들부터 먼저 철회돼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대북 제재 해제에 문재인 정부가 적극 나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처음으로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언급하며 “미국의 군사적 위협과 적대시 정책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표현 형태와 수법은 더욱 교활해지고 있다”고 했다. 한·미를 갈라치기 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북의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 정권 말에 무리하게 남북 대화를 추진하다가 오히려 한·미 동맹만 손상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 여권은 정상회담 등 남북 이벤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미 물밑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관측도 있다.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 멘토 중 한 명인 정세현 전 평통 부의장은 “박지원 국정원장이 김여정 부부장과 핫라인으로 좀 통하는 것 같다”며 “준비 잘하면 (정상회담이) 아마 11월이나 늦어도 12월 중에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여권 내에서는 올해 말 남북 정상 간 만난 뒤 내년 2월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미·중이 함께하는 종전선언까지도 가능하다는 구체적인 시나리오도 나온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북한의 응답이 굉장히 빨리 온 건 매우 좋은 징조”라며 “국회도 남북 적십자 회담과 판문점 선언 비준 등을 적시에 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고 했다.

하지만 이런 우리 정부의 움직임을 국제사회는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미국 등은 대화의 문을 열어놓지만 ‘도발에 대한 보상’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이든 미 행정부는 구체적 비핵화 진전 없이 대북 제재를 해제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지난 29일(현지 시각) 언론에 보낸 입장에서 “지역 및 국제사회 정세를 불안하게 만드는 (북한의) 모든 불법적 미사일 발사를 규탄한다”고 했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사무총장실 대변인은 북한의 극초음속 미사일 발사가 “매우 충격”이라고 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요청으로 30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문제에 대한 비공개 회의를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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