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여정 노동당 제 1부부장./조선중앙TV 연합뉴스
 
북한 김여정 노동당 제 1부부장./조선중앙TV 연합뉴스

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이틀 연속으로 남북 관계와 관련한 담화를 내고 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했다. 김여정은 지난 24일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 선언 제안에 대해 “흥미 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했다. 이에 청와대와 여권(與圈)이 즉각 환영의 뜻을 나타내자 하루 만인 25일 다시 한발 더 나아가 정상회담까지 거론하며 화답한 것이다. 4차 남북 정상회담은 문재인 정부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사안 중 하나다. 김여정이 연이어 대남 유화 메시지를 발신한 배경에 대해 “임기 말 대북 업적 쌓기에 매달리는 남한 정부의 다급함을 이용해 제재 해제, 핵보유국 인정 등을 얻어내겠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여정은 25일 저녁 조선중앙통신 담화에서 “공정성과 서로에 대한 존중의 자세가 유지될 때만이 비로소 북남 사이의 원활한 소통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며 “나아가 의의 있는 종전이 때를 잃지 않고 선언될 것은 물론 공동연락사무소의 재설치, 북남 수뇌 상봉(정상회담)도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다”고 했다. 김여정은 정상회담 조건으로 ‘공정성을 잃은 이중 기준’을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자신들의 핵·미사일 개발이 자위권 차원이니 문제 삼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 및 탄도미사일 발사는 국제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에 따라 금지된 것이다. 이를 제거하라는 것은 곧 안보리 결의에 따른 대북 제재를 해제하라는 뜻이다. 나아가 종전선언·정상회담 등 대가로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북한 요구에 응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미국·일본·호주·인도 4국 연합체 ‘쿼드(Quad)’ 정상은 24일(현지 시각)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등 4국 정상은 이날 오후 워싱턴 백악관에서 첫 대면 정상회담 후 공동성명에서 “우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들에 따른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재천명한다”며 “북한이 유엔 의무 조항들을 준수하며 도발을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유엔 안보리 대북 결의안은 북한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CVID)으로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탄도미사일 발사나 여타 대량살상무기(WMD)도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제65차 총회 마지막 날인 이날 북한의 핵 포기(CVID)를 강조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날 총회에서 캐나다 대표는 “북한은 핵 보유국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단합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쿼드 4개국 정상들 첫 대면회의… 北 완전한 비핵화 촉구 공동성명 - 24일(현지 시각) 미 백악관에서 첫 대면 회담을 한 미국·일본·호주·인도 연합체‘쿼드(Quad)’의 4국 정상들이 마스크를 쓴 채 함께 걸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이날 4국 정상은“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AP 연합뉴스
 
쿼드 4개국 정상들 첫 대면회의… 北 완전한 비핵화 촉구 공동성명 - 24일(현지 시각) 미 백악관에서 첫 대면 회담을 한 미국·일본·호주·인도 연합체‘쿼드(Quad)’의 4국 정상들이 마스크를 쓴 채 함께 걸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이날 4국 정상은“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AP 연합뉴스

김여정은 25일 담화에서 최근 자신들의 신형 미사일 발사 등을 ‘자위권 차원의 행동’으로 표현했다. 반면 한미연합훈련 등을 겨냥, “미국과 남조선이 자기들의 군비 증강 활동을 ‘대북 억제력 확보’로 미화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이중 기준”이라고 했다. 이는 선후(先後) 관계를 뒤집은 억지 주장이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대북 제재는 북한의 핵 위협을 막기 위해 결의한 것”이라며 “먼저 한반도 안보를 위협한 북한에 대응하는 것을 이중 잣대라고 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김여정의 ‘정상회담 담화’에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일제히 환영하고 나섰다. 청와대는 공식 입장을 내지 않은 채 “담화 내용을 신중하고 면밀하게 검토 중”이라고 했지만, 내부에서는 ‘남⋅북⋅미 대화의 물꼬가 트이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감지됐다. 통일부는 “북한도 남북 관계의 조속한 회복과 한반도의 평화·안정을 바라고 있다”며 “의미 있게 평가한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용빈 대변인은 “멈춰있던 남북 대화 재개를 알리는 파란불”이라고 했다. IAEA 총회에서 한국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은 국제사회가 종전 선언을 위해 힘을 발휘해줄 것을 촉구했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8월에도 남북 통신연락선을 복원했다가 한미연합훈련을 빌미로 2주 만에 일방적으로 단절했다. 북한은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을 세 차례 갖고 ‘적대 행위 근절’을 골자로 한 9·19 군사합의를 체결했지만 역시 지키지 않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서해에서 한국 공무원을 사살·소각했고 최근엔 각종 신형 미사일 발사, 영변 핵시설 재가동 등 안보 위협을 지속하고 있다. 남북이 종전 선언, 연락사무소 복원, 정상회담 등에 합의한다 해도, 북한은 이를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 외교관 출신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은 “종전 선언을 통해 남북이 ‘상호 존중’ 원칙에 합의하면 한미는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할 명분을 잃게 된다”며 “김여정 담화 중 보고 싶은 부분만 과대 해석하여 북한이 바라는 종전 선언의 함정에 빠진다면 스스로 북한의 핵 인질이 되는 ‘종속 선언’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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